Reader's Essay :: USA

American West

다시 찾은 미국 서부

가격과 성능을 중시하는 내게 작년 5월 매력적인 기회가 왔다. 5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으로 인천-로스앤젤레스 항공권을 구한 것이다. 긴 휴가를 낼 여건이 안 돼 짧은 시간에 속성으로 미국 서부를 여행했다. 저렴한 가격에 미국을 여행했다는 만족감도 잠시. 귀국하는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아쉬움이 강하게 남았다. 그래서 그 해 12월, 미국행 비행기에 다시 올랐다. 역시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시간이었다.
10시간이 넘게 태평양을 날아 미국에 도착한 날은 12월 25일, 바로 크리스마스였다. 출발할 때도 한국은 크리스마스였는데 시차 영향으로 크리스마스를 하루 더 선물 받은 셈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사랑을 확인하는 연말에 떠난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평생 기억될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경험할 생각에 기대가 컸다. 기독교 교리를 근간으로 세워진 국가, 미국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뻐하는 모습은 어떨까.
글과 사진 김병옥 에디팅 이소윤 기자

김병옥 l 서울시 영등포구 당산동
연휴 때마다 호시탐탐 여행 계획을 세우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작년 한 해는 7번의 해외여행으로 재정적 부담은 있었으나 추억 부자가 되어 버렸다.

코이트 타워에서 바라본 샌프란시스코 스카이라인.

미서부에서 경험하는 특별한 연말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쉬웠던 연말 분위기를 라스베이거스에서 완벽하게 만회했다. 라스베이거스는 고급 호텔을 합리적인 가격에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새해를 앞둔 연말은 지극히 예외다. 연휴를 즐기려는 미국인과 전 세계의 관광객들이 몰리다 보니 평소 숙박비의 두세 배를 지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즌에 라스베이거스에 가야 할 이유는 ‘새해 전야 행사New Year's Eve Celebrations’ 때문이다.
호텔들은 가장 핫한 팝가수와 디제이를 내세워 공연과 파티를 연다. 그리고 저녁이면 약 6킬로미터의 사우스 라스베이거스 대로를 차 대신 전 세계에서 몰려온 인파가 가득 메운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으로 새해를 맞이하면 대로를 따라 줄지은 호텔들이 하모니를 이루듯 동시에 화려한 불꽃들을 쏟아낸다. 이보다 더 화려한 연말이 또 있을까.

불꽃놀이와 함께 새해를 맞이하는 라스베이거스.
레스토랑 앙젤르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맛본 수준급 스테이크.
롬바드 거리의 Z자 도로에서 차들이 꼬리를 물고 내려오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야경을 즐길 최고의 장소, 트윈 픽스.
트윈 픽스에서 본 샌프란시스코 시내.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 보고 싶은 풍경

시차의 영향인지 새벽에 눈이 번쩍 떠졌다. 창밖의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붉은 빛이 이불을 걷어차게 했다. 창문에 서서 일출을 바라보는데 감동이 밀려왔다. 이내 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가 떠올랐다. 아직 잠이 덜 깬 일행은 호텔에 남겨둔 채 차를 몰아 ‘트윈 픽스Twin Peaks’로 달렸다. 서둘러 도착한 트윈 픽스에는 운이 좋게도 해가 아직 그 모습을 다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 오르니 마켓스트리트를 따라 높이가 비슷한 빌딩들이 질서를 지키듯 서 있고, 도시를 감싸는 샌프란시스코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름철에는 안개가 자주 껴 시내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데, 겨울철이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경관을 즐길 수 있었다. 해가 비추는 언덕으로 시선을 돌리니 이 황홀한 일출을 향해 지어진 집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파스텔 색을 입고 있다. 각각의 개성을 가진 채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보기 좋다. 이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색을 고르는 탁월한 재주가 있어 보인다. 이후 트윈 픽스를 두 번이나 다시 찾았다. 한 번은 일행들과 다 함께 간 것이고, 또 한 번은 야경을 보기 위함이었다. 여행 중에 같은 장소를 두 번 이상 가는 건 드문 일이다. 트윈 픽스에서 일출과 야경 그리고 한낮의 모습을 모두 보고 나니, 샌프란시스코에 살아 본 유학파라도 된 듯 으쓱했다.

도시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다양한 방법

토목공학을 전공한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기대하며 찾은 곳은 ‘금문교Golden Gate Bridge’이다. 이를테면 조각을 공부한 조각가가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조우하는 모습과 같다고 할까. 금문교는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는데 그 기록을 뺏긴 지금도 여전히 가장 유명한 현수교이자 가장 아름다운 교량 중 하나이다. 금문교가 위치한 골든게이트 해협은 물살과 바람이 무척 세 다리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당대 유명 토목공학자들이 지혜를 모아 일궈낸 기술적인 진보이다. 흥미로운 건 채색을 담당한 것이 공학자가 아니라 건축가 ‘어빙 머로우’라는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건축가가 공학자보다 미적 감각이 탁월한 모양이다. 공학자가 색을 골랐다면 현재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봤다.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가 금문교가 아닐 수도 있었겠다는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유난히 언덕이 많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가파른 언덕을 Z모양의 구불구불한 길로 만들어 유명해진 ‘롬바드 스트리트Lombard Street’가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줄지어 내려오는 차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려는 관광객이 가득하다. 차를 가져온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Z모양의 내리막길에서 운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 역시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긴 차량 행렬에 합류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발견한 건 러시안 힐 맞은편의 전망대 ‘코이트 타워Coit Tower’. 길고 긴 줄을 포기할 이유가 바로 저 곳에 있으리란 희망을 품고 쿨하게 롬바드 스트리트를 다음으로 양보했다.
코이트 타워로 향하는 길 또한 언덕의 연속이다. 재밌는 건 오르는 행렬에 동참하면 차를 돌리기 매우 힘들단 사실이다. 입장료를 내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워에 오르면 사방을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창틀 사이로 금문교, 알카트라즈 섬, 그리고 트랜스 아메리카 피라미드 등 샌프란시스코의 대표 관광지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한 가지 팁은 늦은 오후에 방문하면 점점 해가 지면서 석양에 물들어 가는 다채로운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으니 눈으로만 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카메라로 이 감동을 다 담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연신 셔터를 누르게 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지인처럼 즐기는 근교 드라이브

샌프란시스코에서 어학연수한 지인의 추천을 받아 ‘나파 밸리Nappa Valley’로 가는 여정을 준비했다. 와인을 즐겨 마시지 않아 잠시 망설였지만 숙소에서 나파 밸리로 향하는 동선에 있는 ‘뮤어 우즈 국립기념지Muir Woods National Monument’를 들리기로 하니 알찬 여행 코스가 완성됐다.뮤어 우즈 국립기념지에는 현존하는 생명체 중 가장 크다는 레드우드Costal Redwood가 즐비하다. 최대 100미터까지 크는 나무들의 높이를 가늠해 보려 그 끝을 보고 있으면 뒷목이 아파온다. 운이 좋게도 방문한 날에는 소나기가 내렸다. 수증기를 한껏 머금은 나무가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수백 년의 세월을 간직한 나무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치 나를 잘 아는 할머니를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연이 선물하는 스톤치드에 젖어 있자니 머리가 맑아짐을 느낀다. 평소 머릿속을 가득 메웠던 번뇌와 욕심들이 일시적으로 잊혀진다. 그야말로 자연만이 줄 수 있는 힐링이다. 차로 한 시간이면 올 수 있는 이런 공원을 갖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주민들이 한없이 부러워진다.

차를 돌려 한 시간정도 이동하면 나파 밸리에 도착한다. 와인에 대해 무지한 나도 ‘와인하면 이태리와 프랑스지’라며 아는 척을 할 텐데, 블라인드 테스트로 콧대 높은 이태리와 프랑스 와인을 이긴 전적이 있는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와이너리 투어는 생략한 채 테이스팅에 전투적으로 임했다. 오감을 총동원해 기필코 맛을 구별해 내겠다는 굳은 의지로. 순차적으로 화이트 와인 1종과 레드 와인 3종의 맛을 보니 신선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맛을 보면 볼수록 맛의 차이는 점점 미궁으로 빠지고, 그저 다 맛있단 생각이 든다. 과연 몇 개 와인을 사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두 종류의 와인을 구매했다. 조만간 이 와인들을 마시며 이 순간을 회상할 생각을 하니 입가에 미소가 돈다.

자동차로 미서부를 여행하면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특히 렌터카를 이용해서 그랜드 캐년 투어를 가는 경우, 라스베이거스를 포함하는
네바다 주와 그랜드캐니언이 있는 애리조나 주 사이에는 1시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이다. 일행 모두가 여행 꽤나 다녀본 사람들이었지만 자동차로 이동하는 동안 시차가 발생하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물론 다행히도 예약한 그랜드캐니언 헬기투어는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다.
만일 헬기가 아니고 귀국하는 비행기였다면 어땠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미국 자동차 여행이 즐거운 이유

미국 서부를 여행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로컬 비행기나 버스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자동차이다. 가격과 성능을 가장 중시하는 나는 10시간의 고된 운전도 마다하지 않기에 두 번째 미국 여행도 자동차로 즐겼다. 미국에서 렌트하는 차량은 앞좌석 유리에 선팅이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운전을 하며 강렬한 햇살을 오래 받다 보면 강인한 체력을 가진 사람도 졸리기 마련이다. 장시간의 고단함, 졸음과의
사투를 벌이면서도 자동차로 미국을 여행하는 이유는 운전하며 마주하는 대자연의 광활함과 다채로운 풍경 때문이다. 황량한 사막인가 싶다가도 어느덧 푸른 녹지가 펼쳐지고, 그림 같은 초목 위에서 풀을 뜯는 소를 보는 재미도 있다. 무엇보다 끝없이 뻗어 있는 도로를 달리면 도시 생활로 답답해진 마음에 숨통이 트인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현수교, 금문교.
일몰과 그랜드캐년의 콜라보레이션.



한없이 뻗은 도로와 붉은 일몰.
수백 살이 넘는 나무 사이를 거니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