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er's Essay ::Scotland

이토록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풍류를 아는 친구가 있다. 한시를 술술 읽는 국문학 박사인데 술을 매우 좋아한다. 그녀가 어느 날 양조장 투어를 하겠다며 스카치 위스키의 본 고장 스코틀랜드로 떠났다. 운전기사를 자처한 남편 덕에 그녀는 다양한 위스키를 맘껏 마셨다. 자연경관이 아름다우니 술이 더 술술 들어갔다. 한때 술에 취해 자연에 취해 물아일체의 경지를 경험했다는 그녀. 그 친구는 결국 여행 마지막 날 퀴랑(Quiriang)의 아름다운 트래킹 길을 걸으며 술병 속앓이를 톡톡히 했다.  어느새 경치는 보이지 않고 이 산 속 어디로 응급 헬기를 불러야 하나 고민했단 그녀의 여행 후일담. 나는 박장대소를 금할 수 없었다.

에디팅 편집부 글과 사진 김지희

김지희 보스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를 마치고 뉴욕에 거주 중이다. 작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모색하고 있다. 스릴러 소설과 겨울. 가사가 있는 재즈를 좋아한다.

맥주 반 캔에 심장이 쿵쾅대는 나야 양조장 보다 퀴랑. 그러니까 그녀의 SNS를 통해 본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반해 스코틀랜드 여행을 꿈꾸게 됐다. 그리고 석사 동기의 영국 결혼식 청첩장이 집에 도착한 이번 여름. 우리 부부는 드디어 여행 계획에 착수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딘버러와 하이랜드 스카이 섬을 둘러보는 스코틀랜드 여행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관문, 에딘버러(Edinburgh)

런던 킹스 크로스 역에서 열차를 타고 에딘버러에 도착하면 웨벌리(Waverly)역에서 내린다. 도시는 역 앞의 프린세스(Princes) 스트릿을 중심으로 북쪽의 신시가지와 남쪽의 구시가지로 구분되며 두 곳 모두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중세부터 군사 요충지로 발전한 구 시가지는 성곽 안의 요새와 같다.

천의 요새 에딘버러 성과 시가지의 높은 석조건물들이 그리는 견고한 스카이라인은 에딘버러를 방문하는 여행객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다.  구시가지의 로얄 마일(Royal Mile)은 동서로 길게 뻗은 이 역사적인 거리로 동쪽 끝에는 에딘버러 성, 서쪽 끝에는 영국 여왕의 스코틀랜드 저택인 홀리루드 궁(Holyrood Palace and Abbey), 그 사이엔 세인트 자일스 교회 (St. Giles Church)등이 위치해 있다.

큼직한 돌이 제법 촘촘히 박힌 길은 예전엔 왕을 비롯한 고귀한 신분만 걸어 다닐 수 있었고 하층민들은 로얄 마일 대신 클로즈 (Close)라고 불리는 사잇길을 통해 구시가지를 우회해 다녔다. 클로즈는 크기가 제법 넓은 것도 있고 몸 하나 들어갈 정도로 좁은 것도 있는데 어둡고 비좁은 길의 특성 때문인지 에딘버러의 수많은 유령 이야기가 생산되는 곳이다.

로얄 마일 양쪽에는 유서 깊은 펍과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다양하게 들어서 있다. 집 냉장고에 붙일 기념품 자석을 몇 개 사고 스코티쉬 타탄(Tartan) 문양이 들어간 킬트 치마를 구경하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세인트 자일스 교회에 도달한다. 영국 고딕양식의 외관이 돋보이는 세인트 자일스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당으로 지어졌지만 이후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구심점이 되며 더 유명해졌다.

교회 앞 의회광장에는 메르카트 크로스 (Mercat Cross)라고 불리는 14미터 높이의 조형물이 있는데, ‘시장의 십자가’라고 불리는 이것 앞에서 예전에 궁에서 파견된 사람이 왕실의 소식이나 공지사항 등을 전달했다고 한다. 조형물의 꼭대기에는 유니콘이 조각되어 있다. 유니콘은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지만 힘과 강인함을 지닌 동물로도 알려져 있어 스코틀랜드의 국가 동물이 되었다고 한다. 에딘버러 출신의 계몽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 (David Hume). 흄과 생전에 깊은 학문적 우정을 나눈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동상을 둘러본 후 빅토리아 스트릿을 향한다.

원래 이 곳은 웨스트 보우(west bow) 라고 불리던 곳으로 저지대인 그래스 마켓 지역과 고지대인 캐슬 힐 지역을 연결하는 가파르고 위험하기 그지 없는 길이었다. 그것을 건축가 토마스 해밀턴이 1829년부터5년간의 공사를 통해 원만하고 아름답게 오르는 나선형 비탈길로 탈바꿈 시킨 것이 오늘날의 빅토리아 스트릿이다.

빅토리아 스트릿은 구 시가지에서 가장 예쁜 길 중 하나로 손꼽힌다.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비탈길 양쪽의 아름다운 건물들에 다양한 가게들이 들어서있다. 빅토리아 스트릿은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롤링에게 큰 영감이 된 곳인데, 좁은 골목과 형형색색의 건물들은 소설 속 마법사들의 장터로 불리는 ‘다이애건앨리’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에딘버러를 여행하며 펍(Pub)음식을 맛보지 않을 수 없다. 인상적이었던 스코티쉬 푸드는 스카치 애그와, 해기스 (Haggis), 컬렌 스킹크 (Cullen Skink), 스테이크 & 에일 파이, 디저트인 스티키 토피 푸딩(Sticky Toffee Pudding)이었다. 해기스는 양의 내장으로 만든 푸딩이다. 양파와 향신료를 내장과 함께 다진 후 케이싱에 넣어 삶은 음식인데 펍에서는 프리터스(동그란 튀김형태로 만든 것) 형태로 많이 판다.

컬렌 스킹크는 훈제한 대구살과 감자 등을 넣어 만든 걸죽한 수프다. 스코틀랜드 북쪽 해안가에 위치한 소도시 컬렌(Cullen)에서 유래하였으며 스킹크(skink)는 스코틀랜드 어로 생선 수프 또는 스튜를 뜻한다. 우리가 주문한 컬렌 스킹크에는 생선살과 감자가 넉넉히 들어가 있어 둘이 나눠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

수프는 따뜻했고 풍미가 좋았다. 생선살은 부드러웠고 감자는 먹기 좋은 사이즈로 적당히 익어 있었다. 스테이크 앤 에일파이는 고소하게 구워진 페이스트리 안에 갈색 그레이비를 뒤집어 쓴 소고기들이 가득한 맛있는 요리다. 곁들여 나오는 매쉬드 포테이토와 환상적인 궁합을 자랑하며 남편으로 하여금 맥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시게 한 주역이다.

게일 민족의 땅, 하이랜드 (Highland)

에딘버러 이후 우리가 향한 곳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였다. 하이랜드는 높은 산맥과 호수,길게 이어진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갖고 있는 고지대의 땅이다. 이곳에는 영국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벤 네비스 (Ben Nevis)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온 7500개 이상의 길쭉한 만(lochs)이 있다. 에딘버러에서 북서쪽으로 3시간을 달려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글렌 코(Glenco)였다. 글렌 코는 화산 폭발과 빙하의 이동으로 만들어진 지형으로 산세가 빼어난 곳이다.

운무에 쌓인 가파른 협곡은 신비롭고 산 중턱의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보기에도 매우 시원하다. 운이 좋다면 글렌 코를 지나며 하이랜드의 소, 해미쉬 더 헤어리쿠 (Hamish the Hairy Coo)를 볼 수 있다. 헤어리쿠는 니은 자로 솟은 뿔과 귀까지 덥수룩하게 덮은 생각 색의 머리털을 가진 귀여운 소다. 바람이 불면 선한 눈과 분홍색 콧망울이 드러나 사랑스러움을 더한다.

육지와 연결된 스카이 브릿지 섬을 건너 여행의 최종 목적지로 삼은 스카이 섬 (Isle of Skye)에 들어갔다. 스카이 섬은 영국 서쪽 해상에 있는 이너 헤브리디스 제도 (Inner Hebrides Is)의 섬 중 가장 큰 섬이다. 스카이 (Skye)는 고대 노르웨이어로는 ‘구름’이라는 뜻을, 게일어로는 ‘날개’라는 뜻을 갖고 있다.

바이킹 족 문헌에 따르면 이 구름의 섬은 “안개비에 꽁꽁 쌓인 쿨린 힐 (Often-mist-enshrouded Cuillin Hills)” 이라고도 불렸는데, 쿨린 힐은 스카이 섬의 역동적인 지형을 형성하는 바위 산맥을 일컫는다고 한다. 스카이 섬에서 북쪽의 트로터니쉬(Trotternish) 반도는 주로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바람에 신비롭게 깎인 봉우리들과 거대 암석으로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산을 좀 탄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방문하고 싶어하는 유명한 두 트래킹 코스 퀴랑(Quiraing)과 올드 맨 오브 스토르 (Old man of Storr)가 이곳에 있다. 

퀴랑은 평평한 고지대, 암석절벽, 산사태로 붕괴된 지형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거대한 바람에 쓸려나간 듯 붕괴된 지형에 고지대와 저지대를 가릴 것 없이 깔린 푸른 이끼가 기가 막힌 구도와 색감을 연출한다. 땅에는 군데군데 습지가 있고 물 웅덩이가 있으며 키 작은 관목과 잡풀이 뒤섞여 자라고 있다.

정해진 트래킹 코스를 조금만 벗어나도 발이 푹푹 꺼질 정도로 땅은 푹신하고 축축하게 젖어있다. 올드 맨 오브 스토르는 오래된 화산 지형인데 수 차례의 산사태를 거치며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수 마일 밖에서도 볼 수 있는 뾰족한 현무암 봉우리가 특징으로, 이 봉우리가 깎인 옆 모습이 마치 노인의 얼굴을 닮았다 하여 현재의 지명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토르(Storr)는 고대 노르웨이어로 ‘Great man’을 뜻한다.

우리가 갔을 때 올드 맨 오브스토르를 오르는 길은 아침에 내린 비로 인해 매우 미끄러웠다. 가파른 좁은 길에 비바람에 부서진 작은 돌덩어리까지 트래킹 코스 안으로 들어와 한 걸음 떼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산을 오르다 돌아본 발 아래의 풍경은 그때까지 흘린 땀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낮게 운행하는 구름과 은을 녹여 논 듯 한 호수. 관목과 이끼, 습지와 엉겅퀴, 각진 돌덩이가 엉킨 신비롭고 이국적인 대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조화롭고 고즈넉하게 만드는 평화로움이 그곳에 있었다.

안타깝게도 비를 머금은 안개는 올드 맨 오브 스토르 꼭대기에 머물며 봉우리를 꽁꽁 숨겨버렸다. 조금 더 올라가봐도 길은 더 가파르고 미끄러울 뿐 우리가 기대한 깨끗한 봉우리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안개 사이로 슬쩍슬쩍 보이는 봉우리의 모습에 만족해야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리던 순간이었다. 물론 구름 덕분에 한결 몽환적이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풍광이 만들어지긴 했다. 남편은 사진에서 본 맑은 날 모습 보다 한결 멋있다며 감탄을 내뱉기도 했다.

남편이 옳았다. 조용히 눈을 들어 산을 계속 보니 아름다움은 가려지지 않고 그 곳에 있었다.  그 사이 빗발이 다시 굵어졌다. 변화무쌍한 스코틀랜드의 날씨를 경험하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날씨에 대한 여행 후일담을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며 남편과 웃었다. 어느새 급히 하산하는 사람들이 좁은 길에 몰렸다. 한때 트래킹 루트에 정체가 빚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옛날 옛적 올드 맨 오브 스토르는 스코틀랜드 뱃사람들의 자연 등대였다고 한다. 하늘로 솟은 검은 현무암 봉우리가 멀리서도 눈에 확 띄었기 때문이다.어쩌면 언젠가 나도 저 봉우리를 등대 삼아 이 곳을 다시 찾을 수 있지 모를 일이다. 짙은 삶의 파도와 안개를 거치다 보면 돌고 돌아 이 곳에 다시 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아쉬운 일이 있었다면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일이다. 누군가 여행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새로운 발견과 배움. 즐거운 우연과 정갈한 음식이 가득 했던 이 여행길. 몇 시간을 바라봐도 질리지 않던 하이랜드의 광활한 목초지와 푸른 이끼가 덮인 검은 대지...

아, 이 곳에 이르는 동안 나의 스코틀랜드는 이토록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