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 잡지를 읽다 한 귀퉁이에 실린 광고를 발견했다. "<페레로> 사는 초콜릿 소믈리에 교육에 참가할 일반인을 모집한다. 단, 자격조건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 것"(광고를 낸 초콜릿 회사 본사가 이탈리아다.) 그 광고를 본 후 난 벨기에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에디팅 편집부 글과 사진 하아영

하아영 부산 수영구
여행을 좋아하고, 문화예술 향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토포필리아를 삶의 중요한 이유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초콜릿은 추억을 담고

마감 시한이 약 한 달 남은 시점에서 이탈리아어를 배워도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만약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았다면 당연히 지원했을 것이다. 한때 나는 쇼콜라티에나 초콜릿 감별사 같은 일에 관심이 많았다. 초콜릿이라고 하면 저절로 지갑이 열렸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초콜릿에 빠져 살 줄 상상이나 했을까.

 

​광고 덕분에 묵혀두었던 초콜릿 여행이 떠올랐다. 10년도 더 지난 일인데,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쇼콜라티에의 시연을 직접 보았던 그때의 감흥만큼은 아직도 살아있다. 가슴속에 꽁꽁 품어두어 숙성된 나의 초콜릿 이야기-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보다 초콜릿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진하게 자리 잡고 있어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 지금부터 오래전 그 시간으로 타임 슬립!

초콜릿 박물관을 만나다

2006년 11월 16일, 벨기에에 갔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초콜릿의 본고장이라는 말을 확인하고 싶어서다. 초겨울의 유럽은 비도 자주 오고 스산하기까지 했다. 파리나 런던에 비하면 벨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수도인 브뤼셀과 겐트를 살짝 둘러본 후, 열차를 타고 브뤼헤로 이동했다. 4일 동안 머물렀던 브뤼헤는 매우 작았지만, 운하 주변의 아름다운 집과 아기자기한 가게들로 인해 볼거리가 많았다. 그럼에도 도심을 벗어나면, 사람 한 명 만나기 어려울 정도로 한산했다. 브뤼헤에서의 첫날,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초콜릿 박물관을 찾아갔다.

규모는 작았지만, 초콜릿의 역사, 기원, 카카오 빈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고 마지막에는 초콜릿 제작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쇼콜라티에가 직접 만든 초콜릿은 그동안 내가 먹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이는 말 그대로 눈이 번쩍 뜨이는, 오감을 살려내는 맛이었다. 시연이 끝난 후 나눠준 초콜릿은 단맛보다는 쌉싸래함이 강했고, 은은한 향과 신맛이 천천히 따라왔다. 다크 초콜릿이 주는 무게감이 온몸에 전해지며 내 세포 하나하나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초콜릿의 성지가 바로 여기

그리고 한달음에 초콜릿 거리로 향했다. 고급 초콜릿 가게들이 너무 많아 모든 곳을 방문할 수는 없었다. 보석 알처럼 빛나는 초콜릿들이 사방에 깔려있어 고르기도 힘들었다.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한 나는, 한국에 들어와 있지 않은 제품을 찾아 몇 상자를 구입했다. (레오니다스 제품: 신도림 디큐브에 입점 돼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짐.) 초콜릿 중량에 따라 가격을 산정하는데, 정확히 기억나질 않지만 3박스 이상 구매했다. 가방은 무거웠고, 비까지 내렸는데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초코홀릭 인생은 진행형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초콜릿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제과제빵 강습소는 많았는데, 초콜릿 과정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지금은 한국에도 수제 초콜릿 가게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이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사람을 찾기란 어려웠다. 쇼콜라티에라는 직업조차 낯설었던 것 같다. 혼자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초콜릿 관련 책을 찾아보고, 매년 열리는 호텔제과제빵 페스티벌에 방문하여 정보를 얻는 게 전부였다. 몇 년이 지났을까. 우연히 TV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초콜릿 장인’이라며 어느 여성의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았다.

벨기에에서 공부한 국내 쇼콜라티에 1호라고 한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가 벨기에 초콜릿 투어를 떠났던 때와, 그분이 공부한 시기가 거의 비슷해 보였다. 문득 ‘나는 초콜릿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좀 더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방법이 없다고 너무 쉽게 포기했던 건 아닐까’하는 자책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즐기는 자의 기쁨을 누리기로 했다. 그 후로도 지금도 여행을 가면 항상 초콜릿 가게-그 지역에만 있는 특별한 제품-를 찾아다닌다. 오히려 초콜릿 때문에 찾아가는 곳도 많았다. 유럽 국가나 미국이 아니라도, 아시아 국가들도 초콜릿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카페나 상점들이 많다. 국내에도 최상의 카카오빈을 수입하여 자체 제작하는 초콜릿 가게들이 점차 생기고 있어, 선택의 범위도 다양해졌다.

수많은 초콜릿을 만나며 황홀한 맛에 취했고, 그 기억을 붙잡고 싶어 사진도 많이 찍었다. 저장해둔 수많은 초콜릿 사진을 볼 때마다 흐뭇해진다. 다행히 추억이 담긴 사진은 녹거나 사라지지 않으니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언제나 만날 수 있어 좋다. 아직 체험하지 못한 초콜릿도 무궁무진할 것이다. 혹시 기회가 된다면, 스위스 초콜릿 열차를 타보면 좋겠다. 그리고 모 초콜릿 회사가 운영하는 호텔과 카카오 원산지 투어도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디 그 뿐일까? 카카오를 원료로 만든 다양한 제품도 사용해 봐야하고......

글을 쓰다 보니, 몇 년 전 초콜릿 수업이 생각났다. 파베 초콜릿부터, 망디앙, 비슈, 바크, 가나슈, 트러플 등 열심히 만들었던 그 시간들. 솜씨는 별로라도 맛은 장인 급이라고 허세 부리며 친구들에게 선물했던 기억도.

나는 여전히 , 아주 가끔 망설이기도 하지만, 커피 한잔보다 비싼 초콜릿을 서슴없이 선택한다. '이만하면 나도 초코홀릭 대열에 들 수 있지 않을까?' 더워도, 추워도 내가 선택하는 기호품은 항상 초, 콜, 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