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림과 청파 그리고 회현의 반란

서울역 뒷동네 골목투어 (feat. 도시재생)

 

매일같이 서울에서 전국을 연결하는 기차들이 떠나고 도착하며 수많은 이들의 사연이 오고 가는 서울역. 지방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도 종종 지하와 육상으로 그곳을 스쳐 다니면서 서로 다른 감성의 그림자를 발견하곤 했다. 대한민국 수도의 No.1 기차역다운 위풍당당함이 역시 가장 앞에 있지만, 지난 100여 년의 시간이 남겨놓은 쓸쓸함에 르네상스 양식의 도도함이 어우러진 옛 서울역사의 낭만이나, 이따금 광장 앞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고성을 지르는 애처로운 풍경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러한 서울역의 지난했던 삶을 지금껏 지켜봐 온 동네들이 있다. 중림동과 청파동 그리고 회현동. 낯설기도 하고 친근하기도 한 것 같은, 서울역을 가운데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이들 동네의 구석구석에도 역시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있다. 그럼에도 서울역의 그늘에 가려져 지금껏 조용하기만 하던 이들 동네들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며 과거의 이야기들을 세상에 풀어 놓았다. 도시재생사업이 꺼내준 골목 이야기들. 이제 서울역이 아닌, 주변 골목으로 발걸음을 돌려도 좋다고 손짓하고 있다.

에디팅 편집부 글과 사진 김관수 트래블 인플루언서

#회현동

‘회현’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남대문시장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깎아보겠다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흥정을 걸어 봐도 노련한 아저씨, 아줌마를 당해낼 재간이 없던 기억이 전부였다. 그렇게 찾아간 회현동은 뜻밖에도 시끌벅적한 남대문시장이 아닌, 도심 속에 숨겨진 섬 같았다. 오래도록 외면이라도 당한건지, 누구도 말을 건네지 않아 결국 말을 잃어버린 한 노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그런 초라한 모습이었다. 한겨울 한기가 조금은 사그라든 어느 오후, 서울역을 빠져나와 가장 먼저 회현동으로 발길을 잡았다. 이유는 다른 동네보다는 덜 낯설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서울 시내 한가운데에서 동네를 찾는다는 사실 자체가 낯설었다. 남대문시장 주변, 내가 다녔던 회현동에 진짜 골목이 있긴 했었나.

한양도성 순성길의 숭례문에서 남산 방향 코스를 따라 길을 오르다 보니 조금씩 고도가 높아지면서 회현동의 단편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공중공원이 된 ‘서울로7017’ 고가를 따라 옛 서울역 건물이 멀리서 수줍은 얼굴을 내밀고, 빌딩숲 아래에 포근히 숨은 소담한 집들이 작은 동네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낯설기에 더욱 흥미로운 풍경들도 하나씩 더해졌다. 다세대 주택의 옥상을 주차장으로 사용하는 웃지 못할 진풍경과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지어진 시민아파트이자, 이제는 마지막으로 남은 시민아파트로 기록된 ‘회현 시민아파트’가 여행자의 호기심을 마구 자극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출입구의 나무문과 아파트 옆에 우뚝 선 초현대식 엘리베이터 타워의 어색한 조화도 그렇지만,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가는 모습에서 한때 꽤나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옛 명소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아파트 앞 골목을 따라가면 큰 대로를 만나기 전까지 좁은 골목들이 나뭇가지처럼 이어진다. 골목 안에 자리한 것들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싶은 오래된 풍경들이 대부분이어서 나도 모르게 발품을 팔아 들여다보게 됐다.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마저 가물가물한 이름들이 옛 추억을 저절로 소환시켜준다. 동네 가게 간판에 남아 있는 추억의 브랜드 로고들, 낮은 담장 위로 뾰족뾰족 솟아오른 철창살, 툭 잘라놓은 플라스틱 파이프에서 쏟아내는 난로 연기. 모두가 반갑고 한편으로는 애잔하다. 그 사이사이에 ‘요즘’의 모습들이 하나씩 자리 잡았다.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 활성화 사업의 결과물이자 도시재생의 마중물 역할을 해주는 핵심시설인 ‘앵커시설’들이다. 쿠킹스튜디오 '검벽돌집'이 회현 시민아파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검은색 벽돌이 눈에 띄는 2층 양옥집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공간은 옥탑까지 연결해서 세련미 넘치는 3층짜리 빌딩이 됐다. 그곳에 앉아 남산뷰를 배경으로 직접 만든 요리와 함께 즐기는 프라이빗한 여유가 사뭇 기대된다.

얼마 가지 않아 ‘회현사랑채’다. 이정표가 없다면 과연 찾을 수는 있을까. 스마트폰의 똑똑한 지도 앱들도 찾아내기가 여간 쉽지는 않을 것 같은 깊숙함이 이곳만의 특별한 매력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모여 공동 육아, 방과 후 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회현동 사랑방의 문은 훤히 열려있다. 이미 누군가 찾아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창 안으로 보인다. 사실 이곳에서 특별한 볼일이 없는 여행자이기에 조용히 돌아 나와 골목에 그려진 ‘회현별곡’ 벽화를 감상하기로 했다. 과거가 있는 골목은 더욱 깊게 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회현동에서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앵커시설 중 하나인 ‘계단집’이었다. 이제 잠시 쉬면 어떨까 싶을 때, 때마침 나타나준 카페 계단 집. 옛 시골집이 떠오르는 계단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자 1층에서 2층으로 또다시 계단이 이어졌다. 그렇게 계단으로 이어진 2층짜리 옛 가옥은 이제 커뮤니티 카페로 리모델링 되어 외지인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마침 찾아간 날 2층에서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전시가 열리고 있어 새롭게 문을 연 각 앵커시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을 얻을 수 있었다. 전시가 끝나면 2층 역시 카페로 운영될 예정인 계단 집은 ‘적의 재산’이라는 뜻을 지닌 일본 적산가옥이었다. 그 때문에 도코노마, 다다미와 같은 기존의 원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내부를 재구성한 점도 회현동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이색 요소가 되었다. 카페에서 만난 주민 바리스타와 함께했던 짧은 수다 한판. 돌아 나오는 길, 이곳의 계단이 이어지듯, 골목 속에 그들의 수다가 끊임없이 이어지길 바라봤다. 더는 외딴 섬이 아닌, 사람들의 관심과 발길이 찾아드는 온기 가득한 서울의 사랑방 회현동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한다.

#중림동과 청파동

서울역 뒤편을 서부역이라고 불렀다. 서부역 주변을 제대로 다녀본 적도 없으면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서울역의 변두리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변두리의 이름은 인제 와서 알게 됐지만, 중림동과 청파동이었다. 마치 번화한 도시가 싫어 언덕 위로 도망이라도 친 건지, 그곳 사람들은 서울을 내려다보며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 도심에서 달과 가장 가까운 동네를 걷고 있는 듯했다. 회현동에서 ‘서울로7017’ 고가를 걸어 다시 서울역으로 왔다. 하지만 방향은 반대. 보통 서부역이라고 부르는 서울역 후문 쪽이다. 이쯤에서 행정구역은 중림동과 청파동으로 분리된다.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아도 두 동네는 서로 통하지만, 각각의 볼거리를 고려하여 중림동을 먼저 둘러보고 청파동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중림동으로 가는 길에 수제화 거리가 먼저 눈에 띄었다. ‘모단뽀이 구두의 고향 염천교 수제화 거리’라고 소개된 약 50ｍ 남짓한 거리. 그 짧음에서 옛 명성이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쇼윈도를 장식한 모습에서 여전히 이곳 구두 장인들의 자부심과 해학이 엿보인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단 하나뿐인 구두, 누구나 신고 다니는 틀에 박힌 구두가 아니기에 주의 깊게 둘러보게 되는 매력이 있으니 이 동네까지 와서 수제화 거리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보통의 서울 도심과는 달리 비교적 한갓진 분위기가 느껴지는 중림동의 여유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은 ‘중림동 약현성당’이었다. 입구를 지나 언덕을 오르니 한겨울을 사르르 녹일만한 아늑함과 따스함이 성당 앞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벽돌 서양식 교회라는 수식어에 걸맞지 않은 건축의 모던함과 정교함은 약현성당을 기억하는 첫인상이 되었다. 1892년 지어져 1896년 한국 땅에서 최초로 사제서품식이 거행되기도 했던 대한민국 천주교의 역사가 만들어진 장소이지만, 두 눈에 비친 약현성당은 조금도 거창하거나 거만하게 보이지 않았다. 다만, 고딕 양식이 보여주는 성당의 품위가 오후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던 곳. 대한민국 교회 건축의 모델이 되었다는 단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지나는 길에 들러 잠시 머물러도 좋은 이유가 되어주었다.

약현성당을 내려와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활성화 사업의 대표적 앵커시설로 꼽히는 중림 창고로 향했다. 다양한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이 전시·판매·문화 활동을 펼치는 공간인 중림창고는 본래 창고 건물로 길고양이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악취가 상당했는데, 새롭게 모습을 단장하면서 주민들의 큰 불편 하나가 말끔히 해소됐다. 누구보다도 1971년 지어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 '성요셉아파트‘ 주민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 되었다. 중림창고와 골목 하나를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아파트이기 때문이다.

언덕을 넘어 순식간에 청파동으로 넘어갔다. 청파동은 어쩔 수 없이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뛰었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 올림픽 마라톤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영웅 손기정 선생의 이름으로 가득하다. 청파동에 들어서면 벽, 바닥 등에서 손기정과 연관된 벽화와 조형물 등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모든 게 길이었고, 모든 곳을 달렸다. 오로지 달릴 뿐이었다.’라는 그의 굳은 인생길이 고이 간직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바로 ‘손기정 기념관’이다. 언덕을 넘고 아파트 단지를 지나 손기정 기념관에 닿았다. 붉은 벽돌 건물 속에 무던히도 많은 한 시대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 같은 그 공간에 지금은 손기정의 영화 같은 인생이 빼곡하게 펼쳐져 있다. 짧은 시간 둘러본 기념관의 전시홀은 무료입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잘 꾸며져 있고, 볼거리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무엇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새겼으면 하는 손기정 선생의 정신이 남아 있는 곳이기에 뜸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못내 아쉬웠다.

청파동에도 역시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 활성화 사업의 거점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서계청파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공유 부엌·서가인 '감나무집', 마을 카페 '청파언덕집', 문화예술공간 '은행나무집'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완벽하게 모습을 갖추지 못한 곳도 있고, 문은 열었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드물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곳도 있어 발걸음이 안타까웠다. 하루빨리 본 모습을 찾아 마중물로 제 기능을 다 해야 청파동이 다시 살아날 테니 말이다. 옛 주택과 건물을 매입해서 리모델링을 통해 각 지역의 장점과 특성을 살려서 만든 이 공간들이 드문드문 이어지며, 골목을 따라가는 새로운 골목 투어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길 따라 무작정 걷기만 했다면 지루하고 힘들기만 한 시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마중물이 되어주는 앵커시설이 제 기능을 발휘한다면, 그곳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콘텐츠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 콘텐츠를 즐기고 또 쉬어가며 색다른 체험을 하는 하루가 만들어질 것이다.

길의 마지막, 청파동의 언덕 위에 서서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청파동과 서울역 그리고 멀리 회현동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해 질 녘이었으면 어땠을까. 붉게 물들어가는 석양 속으로 서울의 고단했던 하루가 서서히 사라지는 광경을 맞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 광경은 지금까지는 몰랐던 서울역 뒷동네가 건넨 또 다른 만남을 위한 기약으로 남겨뒀다. 재생과 골목. 그들이 작은 반란을 일으키자 비로소 우리 앞에 나타난 더욱 풍성하고 촘촘한 여행이 이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