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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4월호] 대륙분류 : [아시아] 국가분류 : [대한민국] 도시분류 : [강진]
기사제목
[INFIELD] 강진읍 동네마실, “그곳엔 벌써 봄이 왔드랬었죠”
GANGJIN 코로나19가 겨울의 마지막을 몹시도 시리게 만들고 있던 어느 날, 강진의 이름이 자꾸만 생각났다. 그렇게 이른 봄날 잠시 달려간 강진. 터미널에서부터 강진읍내를 천천히 걸었을 뿐이었지만 마음의 온도는 부쩍 올라갔다. 동네마실 다니듯 그렇게 휙 돌아본 짧은 여행을 지금 다시 떠올리니 코로나로 지친 마음에도 4월의 포근함이 찾아오는 것 같다.
마음의 온도를 높이고 싶을 때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늘 남쪽 땅이 탐난다. 갖가지 봄꽃이 피어 색동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을 빨리 보고 싶은 조급함 때문이다. 남쪽에도 여러 도시가 있지만, 겨울을 털어낸 따스한 감성이 그리울 때는 강진으로 떠나곤 했다. 지도를 펼쳐보면 또렷하게 바지 모양을 그리면서 깊은 만을 이루고 있는 강진은 바지 주머니 속에 한가득 달콤함을 넣어두고 있을 것만 같다. 바다는 가랑이가 살짝 벌어진 움푹한 육지까지 흘러들어 뭍사람들을 통통하게 살찌우고,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월출산의 산세는 남한의 금강이라는 말이 마음껏 실감이 난다. 한때 문화재청의 수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첫 권, 첫 페이지에서 강진과 해남을 소개했다. 그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강진을 남도의 향토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남도 답사의 1번지’라고 칭하며, 첫 페이지에 소개한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찬란한 슬픔의 봄에 피는 모란 읍내에서 남도의 푸짐한 밥상에 역시나 감탄하며 식당 문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를 선택하고 방향을 잡고 가는 방법은 일사천리로 결정됐다. 영랑 김윤식을 만나러 가는 길, 그의 생가까지는 그저 걸으면 된다. 대로를 빠져나와 고양이가 지붕과 담장을 넘나드는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화창한 하늘 아래 곧 봉우리를 터트릴 것만 같은 꽃잎과 낮은 담장을 차지한 파스텔톤 벽화 행렬이 평일 오후의 운치를 더한다. 언뜻 보면 벌써 봄이 무르익은 것 같은 풍경도 보이고, 겨울잠에서 덜 깨어난 것 같은 모습도 눈에 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시간이 가는 대로 변해가는 그들의 서로 다른 모습이 신비롭기도 하다.
‘감성 강진의 하룻길’ 이정표를 지나며 어느덧 ‘영랑’이라는 이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김영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강진을 대표했던 또 다른 시문학파 시인 김현구의 이름도 함께 한다. 그들을 기리는 벽화와 조형물들을 골목과 골목을 이어주고 있는 담벼락에서 마주한다. 그 속에 한때 강진을 물들였던 두 시인의 감성이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아직 모란이 피기에는 이른, 먼 길을 달려온 여행자에게는 아쉬운 계절이지만 영랑생가는 그래서 꼭 찾아가도 좋은 곳이다. 영랑 김윤식이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던 간곡한 마음이 서서히 결실을 보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봄이면 초가집 곳곳에 피어나던 모란, 그 모란이 지고 나면 또다시 모란이 피기까지 한 해를 기다리던 영랑의 간절한 마음을 시비의 12줄 글귀를 통해 들여다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니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든 날 떠러져 누은 꽃닢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디에 모란은 자최도 없어지고 뻐처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니고잇슬테요 찰난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는 '찬란한 슬픔의 봄', 오늘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그 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랑의 심장이 노래했던 것처럼, 삼백예순날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이더라도 찬란한 봄이 지구로 하루빨리 귀환하기를 그의 옛집 마당에서 간절히 바라본다.
Info.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 시문학파를 대표하는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나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등의 주옥같은 시를 발표했던 그의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모란과 우물,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돌담 등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주변이 온통 모란꽃으로 뒤덮이는 5월 즈음이 되면, 이곳은 특히 아름답다. 그득히 피어난 모란과 그의 시를 영랑생가에 앉아 함께 음미해본다면 어떨까. 분명 강진의 봄을 더욱 감성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생가 바로 옆에 시문학파기념관이 있다. 잠시 그곳에 들러 한국 현대시의 탯줄로 불리는 <시문학>의 서정적인 시 세계도 맛볼 수 있다.
봄의 은거지 시문학파기념관을 나와 야트막한 언덕을 잠시 올랐다. ‘사계절 모란향기 머금은 세계모란공원’이라고 적힌 나무 안내판이 발길을 잡는다. 몇 번 강진에 방문했었지만, 이곳은 처음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다. 초라한 입구를 지나 길을 따라가니 꼭꼭 감춰진 비밀의 숲이 열리듯 햇살 눈 부신 아늑한 쉼터 하나가 나타난다. 하얗고 빨간 모란이 넘실대는 꽃동산이 펼쳐진 건 아니지만, 오래도록 잊고 있던 봄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온다. 숨을 크게 들여 마시며 그 봄 내음의 진원지를 찾아본다. 마음속에 봄꽃은 벌써 피고 말았다.
영랑 선생도 볕이 좋은 자리에 앉아 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 강진이 펼쳐진다. 한 눈에 다 잡히고 마는 읍내를 지나면 이곳 사람들의 곡식 창고인 논밭이 이어지고, 금방 바다를 만나고 산마루에 닿는다. 그 장엄한 풍경을 조금 더 높은 곳에서 감상하기 위해 ‘감성 트레일 코스’를 따라 전망대로 오른다. 그리고 곧 또 다른 봄소식을 맞이했다. 18년의 강진 유배 생활에서 자신의 학문을 집대성하며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거듭난 다산 정약용이 전하는 난초의 아름다움.
아름다운 난초가 산비탈에 돋았네
참 아름다운 나의 벗 덕을 지녀 반듯하여라
다른 벗도 좋아하지마는 그대 생각을 정말 많이 한다오 -[출처] 아름다운 난초/ 정약용|작성자 국회의원 이원욱 다산이 이곳에서 강진의 봄을 맞이할 때면 다시 꽃을 피운 난초를 위해 사랑가를 읊었나보다. 강직한 선비는 지고지순한 난초를 두고 감히 거짓을 아뢰지 못했을 텐데. 그가 진심으로 흠모하던 벗 하나를 만난 것만으로도 위안이 찾아든다. 한동안 봄의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Info. 세계모란공원 영랑생가 뒤편에 조성된 세계모란공원은 영랑의 문학적 감성과 보은산 도시공원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생태문학공원이다. 사계절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온실과 세계 각국의 다양한 모란의 자태를 느낄 수 있는 8개국 50종류의 세계모란원, 김윤식 선생의 영랑 추모원, 약수터 물을 이용한 생태연못, 휴식과 공원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등이 조성되어 있다. 2천여 개의 야간 경관조명이 밝히는 그윽한 대나무 숲은 낮과는 또 다른 밤의 매력을 연출한다.
봄날로 달려가는 골목 동네마실의 마무리는 미식체험으로 정하고, 강진의 맛을 찾아간다. 지도에서 ‘청자골한정식맛길’ 위치를 확인하고 다시 걷는다. 영랑생가를 찾아가던 길과는 다른 길이지만, 몇 블록 떨어지지 않아 찾아가는 어려움은 없다. 냉기가 가시지 않은 찬바람도 그리 밉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잠시나마 눈물이 뜨거워진 장엄한 풍경 앞에 머물렀고, 싱싱한 자연의 뜨거운 맛을 찾아가는 길이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꼭 잡은 손끝에서 전해지는 애정의 기운이 빠진 현실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도착한 골목은 뜻밖의 모습을 선보였다. 로보트 태권브이가 늠름하게 간판의 한 가운데를 지키고 서 있는 작은 건물은 옛날 극장이 분명해 보이지만, ‘삼양볼링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분명히 ‘모란다방’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놓고는 결국 카페베네에서 만난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짧은 골목 안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이유를 확인해본다. 사정인 즉, 정부가 공모한 ‘골목경제활성화 사업’에 이 골목이 선정됐고, 국가예산을 들여 새롭게 골목을 정비하고 이제 막 관광객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옷을 입고 깔끔해진 골목과 점포들은 한때 잘나가던 과거를 향해 다시 힘차게 달려간다. 강진극장을 찾던 청춘의 싱그러움이 넘쳐흐르고, 카페베네에 앉아 옛 모란쌍화차를 마시며 연인들이 선을 보고, 맛과 추억을 찾아온 이들이 향수를 품을 수 있는 모두의 골목으로. 그렇게 문화와 예술이 다시 꽃을 피우고 있는 그 골목 너머로 강진읍내의 해가 다시 저물어간다. 비록 낯선 얼굴도 많았지만 포근한 우리네 정이 여전히 녹아있던 강진. 돌아보니 숨겨진 보물을 엿보듯 다닌 것 같던 짧은 시간이기에 강진의 또 다른 봄날이 기다려진다. 알록달록한 봄이 화사하게 웃고 있는 4월의 강진을 기대한다.
Info. 강진극장통 골목길 강진극장통 골목길은 150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수성당'을 중심으로 한 강진읍 구도심 지역이다. 과거에는 '강진극장'을 중심으로 활력이 넘치는 핵심 상권이었으나 현재는 인구 감소 등으로 상권이 급격하게 침체됐다. 주민주도형 골목경제활성화 사업을 통해 옛 강진극장통 골목 역사를 보존하면서 관광자원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24개 점포의 건물 외벽을 정비하고 가로 간판을 조성했고, 주차장 설치, 막걸리체험장 협동조합 운영, 야간경관 감성 조명 등을 통해 새로운 골목길을 만들었다. 또한, 막걸리 체험장과 특화 빵인 강진책빵 판매점을 신설했고, 극장통길 스토리텔링 조형물과 포토존을 조성하며 거리경관 조성과 방문객 이용 콘텐츠를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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