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월간 뚜르드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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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4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이탈리아]     도시분류 : [폼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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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FIELD] 2천년 전의 눈부신 삶, 폼페이

The dazzling life 2,000 years ago, Pompeii
2천년 전의 눈부신 삶, 폼페이

우리는 이제 과학의 발달로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두 달을 걸려 가던 북경도 한 시간이면 간다. 옛 사람들이 보면 거의 축지법이나 순간이동 수준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더 행복해 진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 지구의 지배자처럼 군림한다.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과거로는 돌아 갈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다는 어떤 기 막힌 일들을 벌일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근데 지금도 쉽게 과거로 돌아 갈 수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이태리의 폼페이(Pompeii)! 3월호에 이은 2천년 전의 눈부신 폼페이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이야기를 공개한다.
글과 사진 권석하 편집위원 에디팅 여병구 편집장



고고학자들은 대형상가 건물 5 미터 아래에서 86 미터 길이의 하수도를 발굴해 750자루의 인분을 채취했다. 이 하수도는 성인 키 두 배의 크기이다. 그 인분을 분석한 결과 생각보다는 로마인들이 채소를 많이 먹은 것으로 나타났다. 어떤 샘플에서는 백혈구가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는 박테리아 감염 병으로 인한 것이다. 그들도 현대인과 같이 달걀, 생선, 닭고기, 견과류도 먹었고 심지어는 수입한 과일도 먹었다 한다. 인분 속에서는 보석반지, 목걸이 구슬, 동전 등도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등잔도 있었다고 하니 그 사연이 궁금해진다. 아! 그러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상당히 오래 전 서울근교 박태선 장로의 신앙촌 쓰레기 집하장을 학자들이 발굴조사 한 적이 있었다.  목적은 먼 후일 고고학자들이 이곳을 발굴했을 때 이 쓰레기장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보고 어떤 결론을 내릴까 하는 것을 알아 보자는 이유 때문. 당시에는 거의 광신에 가까운 종교집단의 주거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관련된 물건들이 다른 곳 보다 더 나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 말은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발굴되는 유물만 갖고는 이 곳이 종교집단주거지였다라는 결론을 내릴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 역사의 추적은 이렇게 제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결국 우리가 믿는 고고학도 장님이 코끼리 만지기 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참으로 허무 하다.

폼페이에 대한 잘못된 오해
로마 시대 부자들은 하인들의 보조 없이는 식사를 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로마시대 영화에서 보듯이 높은 베개 같은 것에 기대어 반쯤 누운 상태로 하인에게 요구를 하면 떠서 입에 넣어 주거나 앞에 가져다 주는 식이었다. 부자는 집에서 하인들이나 노예들이 만든 음식을 먹었다. 보통 서민들의 집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시설도 없었고 연료도 부족해 식사를 밖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식당은 그래서 테이크아웃 하는 판매대가 길거리 쪽으로 있고, 조금 안에는 구입한 음식을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시설이 돼 있었다. 그 보다 더 안쪽에는 제대로 술과 음식을 느긋하게 먹을 수 있게 장소에 따라 다른 가격을 받았다 한다. 식당에 그려진 그림 중에 아주 흥미로운 그림도 있는데 두 남자가 싸우고 있는 장면에 그들의 대화가 써져 있다. 내용은 노름에서 이겼다라고 환호를 하는 한 남자와 네가 날 속였다 라고 고함을 치면서 멱살을 잡는 다른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 옆의 주인은 말리면서 싸움은 나가서 하라고 야단치고 있는 것이다. 폼페이에는 이런 식의 프레스코 벽화가 집집 마다 아주 많다. 발굴 초기에 프레스코 벽화를 마구잡이로 뜯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초기의 발굴 목적은 유적 보존이 아니라 보물 찾기 식의 유물 발굴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챙기던지 아니면 당시 왕에게 가져다 바치는 목적일 뿐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나마 위안은 그 중 많은 부분이 나폴리 국립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디론가 사라진 것 보다는 가까이에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현장을 떠난 유물은 뿌리가 뽑힌 나무이고 꺾여 화병에 담긴 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폼페이 현장에 박물관을 지어 보관하면 훨씬 의의도 있고 관람객들에게 친절한 일 겸 제대로 된 일일 것 같다. 폼페이는 나폴리를 보지 않고 폼페이만 보고 가면 반도 제대로 못 보고 간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이다.   


세상은 폼페이가 최후를 맞이 한 것이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 만큼이나 타락한 도시라 신의 저주로 그렇게 되었다고들 얘기한다. 이는 시내에서 곳곳에서 발견되는 사창가와 그리로 가는 길을 일러주는 남성 성기모양의 표지판, 성적인 낙서, 각 가정에 까지 유행한 에로틱한 벽화 등으로 보아 폼페이가 특별 나게 성적으로 아주 타락한 곳이라는 인상 때문에 그 말들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더군다나 이 폼페이가 다시 발견된 18세기는 종교적으로 가장 극심하게 엄격한 도덕을 강조하던 시기여서 이 도시의 멸망은 분명 신의 노여움 때문이었다고 말해왔고 모두들 그러려니 했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보통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데 이상하게도 그 때는 반대로 바다 쪽으로 바람이 불어 해변 도시 폼페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것을 든다. 신의 저주로 바람 방향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주장은 폼페이로 봐서는 상당히 억울할 것 같다. 한번 잘 따져 보자. 과연 이런 엄청난 천벌을 받을 정도로 폼페이만 그 시대 중에서도 유난스럽게 타락한 도시였는지 말이다. 그건 분명 아닐 것이다. 이태리 도시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의 다른 도시들 특히 외국 선원들이 출입이 많은 항구 도시들은 어떠했는가? 그 도시들이 2천년 간 계속 변해 알 수가 없으나 폼페이와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로마제국 내 수천 개 도시 중에서 폼페이는 특별 난 도시도 아니고 그냥 전형적인 도시였을 것이라는 것도 학자들도 인정하는 것이다.

누가 폼페이를 음란하다 했는가?
폼페이가 망한 시기는 유럽에 아직 기독교 영향이 거의 없었든 시기였고 당시의 세계가 온통 남성 우월 중심사회였던 것도 감안해 본다면 후세 기준으로 굳이 폼페이만 싸잡아 문란했다고 질타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타락인지 아닌지를 잘 모르고 그냥 자신들이 해 온대로 살아 왔을 뿐이다. 사실 알고 보면 로마인들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는 모든 면에서 훨씬 근엄한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나르Pascal Quignard는 ‘섹스와 공포Sex and Terror’라는 책에서 그리스 벽화 주인공 표정은 성애의 열락과 환희에 들뜬 듯한 표정인데 로마시대 벽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로 든다. 폼페이 벽화의 여인은 한결 같이 수줍어하고 심각하다는 것이다.  정면으로 바라 보지도 못하고 곁눈질 하고 수줍어하고 겁을 낸 표정이다 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 시대의 환희에 가득 찬 에로티시즘이 불안과 공포에 질린 우수로 변질된 된 것이 로마시대라 했다. 근엄한 염세주의가 로마인의 의식구조 밑바닥에 잠재의식처럼 깔려 있는 것을 발견 한 것이다. ‘욕망이란 음란하고 풍자적이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숭을 떨면서 의연하고 슬프게 보일 정도로 침착했다’ 라고도 했다. 그의 책을 읽고 다시 본 폼페이의 벽화 속 여인들은 정말 저자 말마따나 하나 같이 성애 순간에도 환희가 없는 슬픈 표정이었다. 기독교 사상이 로마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전에도 벌써 그들에게는 이미 성은 억제하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지 결코 마구 즐겨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말인가?


폼페이는 다문화가 섞이는 국제 무역항으로 선원들이 수개월 간의 항해를 마치고 들어 오는 항구였다. 그 정도의 사창가 시설은 당시의 도덕관념으로 보면 크게 욕을 먹을 일은 아니다. 당시 폼페이 인구를 2만의 객석을 갖춘 콜로세움으로 유추해서 5만으로 추정해 볼 때 폼페이인들도    그 시설을 애용했다고 한다면 그 정도의 크기로는 수요 공급이 맞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이다.   다시 말해 토박이들은 그런 시설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창가 벽이나 근처에서 발견되는 낙서에는 외국어들이 더 많이 등장 하는 것과 당시 창녀들의 이름이 외국 이름이 많은 것으로도 그렇게 추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폼페이는 억울하게 외지인들의 타락 때문에 억울하게 두고 두고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는 셈이다. 
폼페이가 소돔과 고모라라는 오명을 들러 쓰게 된 데에는 재발견의 시기가 18세기라는 이유도 큰 몫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는 종교개혁의 바람으로 인해 전 유럽 분위기가 아주 근엄하고 종교적이었든 시기였다. 로마시대 기준으로 보지 못하고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면 폼페이 문화는 정말 해괴망측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타락한 유럽을 다시 바꾸고자 하는 불길이 대륙을 휩싸고 있는데 이런 불경한 문화가 발견되었으니 옳다구나 하고 온갖 누명을 다 씌운 것이다. 정말 별 기괴한 것도 다 용납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감히 집안 벽에 드러내놓고 걸지 못하는 춘화들을 버젓이 집 안에 공개적으로 그려 놓았으니 근엄했든 18-9세기에야 오직 흥분 했겠는가. 어찌 되었건 이렇게 폼페이가 세기를 거쳐 오래 동안 뒤집어 쓰고 있는 오명은 아주 많이 억울한 면이 있다.

폼페이는 결코 타락하지 않았다
폼페이 성애벽화에 관한 오명에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동남아 특히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같은 고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남녀 성애 조각은 성애를 위한 것이 아니라 풍년을 기원하는 비원(悲願)의 모습이었다. 그걸 감안한다면 폼페이 벽화도 그림으로 보여지듯이 꼭 그런 뜻으로만 그려진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말이다. 세계의 많은 문화에서 남자 성기 조각이나 그림은 풍요의 상징이었다. 여인의 몸은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해서 단지 성의 대상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각종 먹을 것을 주는 풍요의 상징인 대지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조각이나 그림의 여인들 현대에 들어 와 비현실적으로 깡마른 여체가 미의 상징으로 되기 전까지는 풍만한 여자가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그 이유는 아이 생산을 잘 하려는 엄마의 몸은 육덕(肉德)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 때문이었다. 그래서 성애로 그려진 벽화가 상징하는 의미는 출산과 수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인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뜻이다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조각이나 그림들을 그려 신에게 바쳐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로마인들에게도 그런 일종의 비의(秘意)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든 여러 가지 요소를 감안하면 이런 유추가 얼토당토 않은 폼페이인 만을 일방적인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몇 년 전 신문에 폼페이 근처에 창녀 촌이 많이 들어 서서 경찰이 단속한다는 기사가 해외 토픽에 등장 한 적이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 와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여행자가 몰리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산업이 있게 마련이니 2천년 전의 그들이 지금의 우리 보다 결코 더 타락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즉, 현대의 우리가 그들 보다 더 도덕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도 그 때 저주를 내린    그 신이 저 활화산을 아직 관장하고 계신다면 이런 꼴을 어찌 보시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더욱이 역사는 돌고 돌아 다시 되풀이 된다는데…… 모골이 송연해 진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폼페이인을 위한 변명을 하나만 더 하자. 폼페이 공중 목욕탕 실내 천장 바로 밑 벽에 아주 야한 성체위 그림들이 수십 개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번호가 쓰여져 있어 목욕탕 이층에 창녀 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한다. 아래층 목욕탕 이층 사창가? 그럴 듯 하지만 학자들이 조사한 바로는 이건 창녀와 관련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옷을 걸어 놓은 위치를 기억을 잘하게 하기 위해서는 번호 만으로는 어려우니 남자들이 잘 기억하기 쉬운 성체위를 그려 놓았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재치와 유머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해 생긴 오해이다. 이렇게 폼페이 인들에게 퍼부어 지고 있는 각종 근거 없는 비난을 이제는 조금 달리 생각하고 거두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로마인들에게 목욕탕은 그냥 몸을 씻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남자들이 공적인 일을 보는 곳이자 사교장이었다. 로마 최고 원로원 회의가 목욕탕에서 열리기도 했다. 아침에 들어 가 하루 종일 거기서 일보면서 먹고 마시고 시간을 보내는 정말 비즈니스와 플레져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몸만 씻고 나오는 곳이 아니기에 그래서 로마의 목욕탕은 아주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일반인들이 출입하던 폼페이 목욕탕도 대리석 욕조는 물론이고 천장과 벽의 현란한 벽화와 조각 등으로 궁궐을 방불케 한다. 폼페이에는 실외에 올림픽 수영장 두 배 크기의 수영장이 있는데 주로 더운 여름에 사용 했다 한다. 이태리 인들은 목욕을 좋아하니 상당히 깨끗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폼페이 공중 목욕탕 욕조에는 물이 들어 오는 구멍만 있고 나가는 구멍이 없는 것이 있다. 물이 상당히 더러웠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당시 의사들은 상처를 입은 채로 탕 안으로 들어 가지 말라고 충고했다 하는 기록을 찾아 내기도 한다. 물을 계속 공급해서 욕조 밖으로 자동으로 흘러 나오게 하는 방법으로 요즘 한국 온천목욕탕처럼 설계가 되어 있기에 그렇게 더럽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물론 다른 데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화산지대라 물이 그렇게 흔하지 않았던 폼페이에서 욕탕의 물이 계속 흐르도록 놔 두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폼페이가 그대로 투영된 나폴리
이렇게 우리는 옛날 사람들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추측만 할 정도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왕을 비롯한 지배층이야 그나마 기록에 남아 있어 좀 알긴 하지만 기록에 나타나지 않고 살다 간 이름없는 민초들의 삶과 생각이 참 궁금해진다. 폼페이 최고의 가이드는 당시 폼페이 사람들이 북적이면서 살아 가는 모습이 궁금하면 나폴리를 가 보라고 권한다. 지금의 나폴리 모습이 2천년 전 폼페이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좁은 골목의 건물들, 나폴리의 명물인 건물들 사이 빨랫줄에 깃발처럼 걸려 있는 옷들, 상점에 걸린 고기와 양념들의 모습, 집 대문, 금속 손잡이 심지어 벽의 낙서 그 내용들까지 모두가 같다는 것이다. 실제 폼페이 벽화에 나오는 대문이나 거기에 달린 손잡이, 상점에 고기와 양념이 걸린 모습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2천 년이란 시간을 초월해 같은 두 도시의 모습이 참 신비롭다. 거리의 냄새와 소음마저도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동차 소음만 빼면. 그러나 가이드는 아마 그때의 폼페이가 지금의 나폴리 보다는 더 깨끗하고 질서가 잡혔을 것이라고 웃었다.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2천 년 전 폼페이 모습에 유럽인들은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우리에게 만일 2년 전 폼페이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 수도 국내성이 그대로 발굴된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큰 사건이겠는가? 폼페이의 발견은 유럽인에게 정말 어마 어마한 사건이었다. 우리의 고구려와는 달리 로마문화는 그들에게 있어 책에서만 존재하던 고대 역사가 아니다. 지금도 그리스 문명과 함께 자신들의 문화와 문명의 뿌리로서 엄연히 살아 있는 화려하고 유려한 로마문명이 신기루처럼 자기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전 도시가 2천 년 전에 급 냉동한 상태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당시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이다. 

폼페이의 발굴은 로마에 대한 향수와 열광을 당시 유럽 전역에 불러 일으켰다. 로마인의 삶을 연구하는 고고학이나 역사학은 물론이고 특히 예술분야는 이 폼페이 발견 이후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회화, 도예, 가구 및 장신구 공예, 실내 장식, 심지어는 건축에 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로코코 양식에서 변화를 추구하던 유럽은 이 영향으로 각 분야에서 네오클래식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이런 연유로 폼페이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덕목 중 가장 큰 것인 이태리 여행의 ‘그랜드 투어’ 목적지로 로마 베니스 플로렌스에 이어 자연스럽게 추가 되었다.

폼페이는 검투사들이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던 대형원형 경기장 콜로세움 객석이 2만 명을 수용할 정도로의 대도시였다. 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잠실야구장이 3만 명 임을 감안하면 당시로서 이 콜로세움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문제는 그 엄청나게 큰 콜로세움을 채울 만큼의 인구가 근처에 살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사람이 자동차가 있어서 달려 올 수 있는 것도 아닌 시절에 말이다. 동시에 폼페이는 당시 최고의 농작물인 포도와 올리브 재배에 아주 기가 막힌 장소인 화산 흙의 언덕을 가진 수확이 아주 좋은 부유한 농촌이기도 했다. 또한 폼페이는 로마시대의 라스베가스 같은 곳이었다. 각종 즐거움이 있는 환락 도시이기도 했고 피서지로도 좋은 곳이어서 로마의 부자들이 별장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무역 선이 가지고 오는 외국문물 때문에 유행의 첨단 도시이었다. 폼페이의 도시 계획은 현대 도시 기준으로 봐도 나무랄 때 없이 완벽하다. 큰길과 골목길이 거의 격자무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만들어 있었다. 

4평방 킬로 미터 크기의 도시를 3킬로미터 길이의 성벽이 둘러 싸고 있는 도시였다. 공중조감도를 보면 머리와 꼬리까지 갖추고 대형경기장이 눈 부분에 있어 도시가 완벽한 물고기 모습이다. 모든   도로 포장하고 심지어는 도로 면에 밤에 눈에 잘 띠이게 작은 흰 돌을 큰 돌 사이에 박아 넣어 놓아 참 앙증맞다. 로마 시대 부자들은 단독주택domus에 살면서 시외에 별장villa를 가지고 있었고 서민들은 시내에 저층아파트 같은 주상복합 공동주택insulae에 살았다. 고도제한으로 인해 3-4층이 보통이었는데 1층은 상점이고 그 위 좁은 아파트에 서민들이 살았다. 큰 길이 아닌 좁은 골목 길 양쪽 집에서 창문을 열면 서로 손이 닿는 정도였다. 런던도 1666년 대화재가 나서 새로 도시 설계를 하기 전까지는 폼페이와 같았다. 이렇게 좁은 길 옆에 지어진 도시 건물은 화재가 나면 금방 서로 불이 번지고 지진이 나면 길 건너 집으로 무너져 넘어 가 참사가 더 심해지기가 일수였다. 시내 중심을 가르는 동서남북의 대로는 마차 두 대가 비껴 갈 수 있을 정도로 커서 나폴리나 베니스 보다 더 넓었다 한다. 포장 도로 바닥에 깊게 파인 마차 바퀴 자국을 보면 도시 역사 7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마차들이 다녀 간지 알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 마차 바퀴 넓이가 지금 유럽 기차들의 레일 넓이와 같다는 점이다.     

2천년 전 폼페이인의 낙서에 담긴 삶
길거리 건물 벽이나 실내에는 낙서가 아주 많다. 그 내용은 지금도 우리가 여느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 같다. ‘내가 다녀 갔다’ ‘누구와 누가 좋아한다’ ‘나는 누구를 미워한다’를 비롯해서  ‘가능하다면 시비를 굳이 가리지 말고 집으로 조용히 가지고 가라’ 라는 인생의 충고의 말 ‘일단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향락을 부추기는 것 까지도 있다. ‘사랑에 빠져야 젊은이는 비로소 완전해진다’ ‘세상의 모든 금을 준다고 해도 내 남편을 팔지 않겠다’ ‘비너스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내 여자 친구를 봐라’ 라는 것도 있다. 물론 간판과 선전 문구들도 즐비하고 심지어는 선거 구호 마저 남아 있다. 폼페이는 1년에 거의 3백만에 가까운 관광객이 다녀 가는 관계로 지역 별로 휴식 기간을 돌아 가면서 가져 한번 와서는 아무리 오래 있어도 도시 전체를 다 볼 수 없다. 거기다가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어 올 때 마다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도시이다. 화산 폭발은 생지옥을 겪은 폼페이인들 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지만 우리 같은 후대인 들에게는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볼 수 없는 2천년 전을 엿 볼 수 있는 타임머신과 타임캡슐을 갖는 엄청난 행운이 되었다. 이렇게 이천 년 전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지금의 우리와 정말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자연의 위력 앞에는 정말 무력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한 치 앞도 못 내다 보고 눈 앞의 이익에만 매달려 아웅다웅하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우리가 별로 한심한 존재가 아니라 것을 알아 안심이 된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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