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orld's Leading Architecture City

환상적인 스카이라인 아래에서의 산책

익숙한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기란 쉽지 않다. 바다나 산과 같은 자연은 그나마 덜하지만, 도심의 흔한 풍경이 주는 감동은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이란 수식어가 붙은 것들에도 무덤덤해질 때쯤, 미국 근현대 건축의 상징 격인 시카고에 도착했다.
모두가 입을 모아 예찬하는 건축의 도시에는 자연이 미처 품지 못한 놀라움이 길을 따라 이어진다.
글 김수현 기자 사진 진하정 기자 취재협조 미국관광청 www.gousa.or.kr, 캐세이패시픽 www.cathaypacific.com

시카고하면 역시 건축이지.” 시카고로 향하기 전, 시카고에 정착했거나 유학 중인 친구들에게 그대들이 사는 도시에 대해 물었다. 과장 없이 다섯 명의 지인은 모두 시카고의 건축을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질문을 바꿔 투어 가이드에게 ‘이제 막 시카고에 도착한 여행자가 해야 할 것’을 물었다. “시카고 강에서 건축 투어 크루즈를 타는 건 어때요?” 이번에도 답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건축으로 유명한 도시가 어디 한두 곳이던가.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게다가 마침 시카고에 오기 전 홍콩에서 하루 스탑오버하며 본 홍콩의 마천루로 인해 눈이 더 높아진 상태였다. 누구나 아는 뻔한 것은 가급적 피하려 했다. 그러나 시카고에서만큼은 한 번 이상 들어봤을 ‘시카고의 건축’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건축을 빼놓고는 도시 자체를 말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시카고이기 때문이다.

1871년 10월 8일, 도시가 바뀐 날

시카고의 건축이 미국 건축 역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것은 자명한 사실.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스페인의 빌바오라는 곳을 세상에 널리 알린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도 이런 말을 했다. ‘시카고는 건축물들이 눈에 더욱 잘 띄는 드문 곳 중 하나다.’ 시카고는 새로운 빌딩 기술의 집합체이자 한 명의 건축가가 표현할 수 있는 창의성의 최대치를 도시 위에 쌓아 올린 곳이다. 시카고가 건축의 도시로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다. 시카고 역사상 가장 최악의 사고로 꼽히는 시카고 대화재 말이다. 너무 유명한 탓에 모두가 들어봤을 법 하지만 시카고의 건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대사건이다. 1871년 10월 8일 밤, 36시간 동안 지속된 화재는 이제 막 태동한 도시를 재로 만들었다. 밤사이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건조한 기후와 강한 바람은 불길을 강 건너까지 번지게 했다. 화재는 이틀 뒤인 10일에 진압됐다. 삽시간에 도시를 뒤덮은 불길, 그 누구도 이날을 기록한 사진이 없다는 사실은 급박했던 상황을 증명한다. 그저 훗날 그린 몇 장의 그림과 통계 수치로 그 끔찍했던 현장을 추측해볼 뿐. 화재가 있기 전까지 시카고의 거의 모든 건물이 나무로 지어진 까닭에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최소 300명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시카고 인구의 삼 분의 일에 해당하는 10만 명이 당장 거리에 나앉게 됐다. 가이드를 통해 화재 진압 직후의 사진을 볼 수 있었는데, 처음 봤지만 꽤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러 사진전에서 본,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도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너무 큰 사고이다 보니 이 불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말이 많았다. 그동안 정설처럼 전해온 이야기는 캐서린 올리어리라는 아일랜드 이주민 소유의 헛간에서 소가 랜턴을 뒷발로 차며 비롯됐다는 것. 심지어 이를 소재로 아이들 사이에서 부르는 노래까지 있다나. 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났다. 불이 올리어리 헛간 근처에서 시작된 것은 확실하나 정황 증거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올리어리는 화재가 발생한 시각에 자신은 자고 있었고, 랜턴을 그곳에 둘 이유가 없었다며 죽기 전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확실한 원인이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녀가 타깃으로 지목된 까닭은 아마도 당시 반아일랜드 정서가 팽배한 상황에서 불이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 주변에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인 그녀가 살고 있었기 때문일 테다. 다행히도 1990년대 말 올리어리와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소는 시카고 화재 발생 후 126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변화는 시작됐다

구시가지가 몽땅 불에 타버린 대화재를 계기로 시카고 건축에는 새바람이 불었다. 불에 강한 내성을 지닌 소재를 찾았고 이를 이용한 재건 작업이 시작됐다. 건축가들이 선택한 것은 테라코타와 주철. 특히 테라코타는 아주 섬세한 조각도 새길 수 있는 훌륭한 소재이기에 초기 시카고 재건에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공간을 채운 것은 건축가들의 도전이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루이스 설리번Louis H. Sullivan을 비롯해 미국 건축사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여전히 시카고의 멋진 스카이라인으로 남아있다. 특히 20세기 초, 다니엘 번햄Daniel Burnham을 주축으로 전개한 도시계획 ‘시카고 플랜The Plan of Chicago’은 도로를 넓히고 도심에 공원, 새 기찻길, 항만 시설을 두는 등 당시 도시계획 스타일에선 찾아볼 수 없는 획기적인 발상으로 가득했다. 비록 일부 계획만 실천됐지만 1912년 번햄이 사망한 뒤에도 종이 위에 글자와 그림으로 표현한 그의 아이디어는 시카고 중심지에서 새 형태를 찾았다. 오래된 것이 더욱 주목을 받는 유럽의 건축과 달리, 시카고 안에서 시선을 모으는 건물들은 모두 근대에 들어 쌓아 올린 것들이다. 고딕 부흥운동에 따른 고딕 양식, 이탈리안 스타일, 신고전주의 양식, 시카고학파, 프레리학파, 모더니즘 양식, 포스트모더니즘 양식 등. 도시 중심부에서 19세기 이후에 발생한 거의 모든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으니 시카고 사람들이 건축을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지사. 이는 타 도시 건축물에 축적된 수백 년의 시간과 대적할 만한 강력한 무기이다.

비슷하게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시카고의 건축물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선 도시를 잘 아는 사람의 설명이 함께하는 투어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루프 지역에 위치한 시카고 건축협회Chicago Architecture Foundation에서는 매시간 다채로운 컨셉의 투어들을 진행한다. 배 위에서 시카고 강을 따라가며 즐기는 크루즈 투어, 가이드와 함께 빌딩 숲을 걷는 워킹투어, 특정 건물에 직접 들어가는 빌딩 투어 등을 통해 시카고 건축에 대한 역사와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을 수 있다. 내가 참여한 것은 Must See Tour. 90분 동안 시카고 다운타운 내 중요한 건축물이 모여 있는 매그니피션트 마일Magnificent Mile과 루프The Loop 지역을 돌며 투어 명처럼 꼭 봐야할 것들을 가이드와 짚어보는 워킹투어이다. 아무런 지식이 없을 때엔 별 감흥이 없던 고층 건물은 가이드 테드의 설명 덕분에 더 깊이 알고 싶은 것들로 바뀌었다. 시카고 건축협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체가 여행자를 위한 투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투어가 내게 준건 방대한 지식 말고도 한 가지 더 있다. 시카고의 다운타운은 걸어 다녀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 제일 중요한 팁 말이다. 화려한 장식이 벽을 타고 넝쿨처럼 올라간 고층 건물, 그 대각선에는 심플하고 현대적인 건물들이 키 재기를, 건너편에선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세련된 빌딩이 도도하게 그 자태를 뽐낸다. 높은 빌딩을 바쁘게 가로지르고, 또 가득 메우는 것은 사람들이다. 멈춰 있는 사진이나 창밖으로는 반절만 전달된 생생한 삶의 현장이 스카이라인 아래에서 펼쳐지는 모습. 이 도시의 가장 일상적이고 사랑스러운 풍경은 열심히 걷는 자에게 백 퍼센트로 다가간다.

1 출근 시간이 지난 루프는 한산한 편이다. 평일 아침의 루프 지역은 비즈니스 캐주얼을 입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직장인이 대다수다. 
2 옥수수를 닮은 두 빌딩의 이름은 마리나 시티. 모더니즘 양식을 가미한 건축물로 주차장, 아파트, 쇼핑센터, 은행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시설을 한 건물에 두었다. 
3 Must See Tour를 함께 해준 가이드 테드. 시카고에 45년째 살고 있다. 그는 오랜 기간 루프 지역에 위치한 한 회사에서 일하다 현재 자원봉사자의 신분으로 여행객에게 시카고의 매력을 전달하고 있다. 
4 앤틱한 시계 뒤로 보이는 모던한 건물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