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int Petersburg
화려함의 강렬한 여운,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을 제법 다녀봤다고 자부했는데 세계지도에서 모스크바가 어디쯤 있는지도 몰랐다. 러시아 국토가 큰 줄은 알았지만 모스크바까지 가는데 9시간이 걸릴 줄이야. 요즘 많이들 찾는 블라디보스토크가 2시간 남짓 걸린다고 하니 러시아의 면적이 상상도 안 된다. 더욱이 직항이 아니라면 목적지인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서 몇 시간을 더 날아가야 한다.
에디팅편집부글과사진이두용트래블인플루언서 취재협조

우여곡절을 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발을 디뎠다. 공항에서부터 느껴지는 이미지는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버스에 올라 시내로 들어서니 상점 간판에 걸린 러시아어만 빼면 유럽의 풍경이다. 낯선 느낌이 전혀 없다. 준비해간 자료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소를 찾아 읽으며 일정의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러시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큰 감동이라도 될 것처럼 벌써 기대가 됐다. 날씨도 정말 좋았다. 하지만 공식 일정을 시작하면서 한 번도 태양을 보지 못했다. 연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광장과 거리 명소가 제외됐다. 대부분 실내와 실내를 차량으로 이동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검색했을 때 화면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멋진 풍경은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짧은 일정, 아쉬움이 컸던 시간,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많은 여행과는 달랐던 나의 첫 러시아, 흐린 날에도 화려하게 빛났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소개한다.

영웅으로 기억되는 괴짜 황제

러시아의 시초인 9세기 루시 국가를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러시아의 역사에 가장 큰 변화와 성장을 준 인물이 표트르(pyotr I) 대제다. 19세기 러시아 재무대신을 지낸 칸 크린 백작은 “우리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표트르인(Petrovian)이라고 해야 한다. 러시아는 표트르의 땅(Petrovia)이다”라며 오랜 영웅을 칭송했다.

이 말은 러시아인들에게 여전히 회자되며 명언으로 사용된다.10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표트르 대제. 오히려 어리다는 이유로 국정에서 제외돼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던 그는 귀족은 물론 서민까지 친구로 삼으며 다양한 계층, 인종, 성별을 만나며 지식과 경험의 폭을 늘려갔다. 유년기에 표트르가 교류했던 사람들은 다양한 국적의 예술가와 선원, 법학자, 상인, 성직자, 군인에 여성까지 있었다고 한다.

20대에 오른 표트르는 다양한 경험을 살려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그의 첫 승리는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고 자연스레 권력의 장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다양한 나라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어울렸던 그는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않았다.

유럽의 서구 문명을 공부하며 새로운 러시아를 꿈꾸던 그는 1697년 250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유럽으로 긴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1년 6개월간 유럽의 여러 나라와 도시를 돌며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 왕이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다양한 일화가 남아있지만, 어느 하나도 평범한 게 없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5개월을 머물렀는데 그곳의 선진화된 조선업을 보고 감탄한 뒤 제국의 황제임에도 신분을 속이고 노동자들과 함께 일을 배우며 지냈다고 한다.

그가 일했던 곳이 네덜란드의 잔담(Zaandam) 지역이었는데 스스로를 ‘잔담의목수’라고 칭했다고 하니 대단하다. 표트르의 대단한 유럽 행보가 멈춘 것은 그의 누이가 선동한 반란 때문이다. 왕이 자리를 비운 러시아는 정권을 탐하는 자들에게 기회였고 표트르의 누이 역시 왕위를 노리고 표트르가 돌아오기 전 권력을 차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로 돌아와 피의 응징을 시작했고 순식간에 정권을 잡아 더 확고히 했다. 그는 자신의 강인함을 보이기 위해 기존 소총병 부대를 완전히 해산시키고, 1,000명 이상의 병사를 고문 후에 처형했다. 그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의 최후를 보여주기 위해 교수형에 처한 수백 구의 사체를 붉은 광장에 오랫동안 방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러시아에 북유럽을 옮겨놓다

더 강력한 왕권을 회복한 표트르는 유럽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러시아에 하나씩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처음 시행한 일은 백성들의 복장과 외모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모든 남성에게 턱수염을 자르라고 공표했다. 당시 긴 수염은 러시아인의 상징과도 같았기 때문에 반발이 심했지만, 황제인 본인이 직접 시범을 보인 뒤 가위를 가지고 다니며 사람들의 수염을 자르기도 했다고 한다.

행보가 정말 일반적이지 않았다. 앞뒤로 늘어지는 장식이 많아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컸던 의상도 당시 프랑스나 독일의 의복을 예로 들며 편한 옷을 입도록 명령했다. 이 역시 잘 지켜지지 않자 다른 지역에서 수도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사람 중 러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표트르는 러시아의 날짜와 시간에 대한 기준도 바꿨다. 당시 러시아는 천지창조 후 7208년을 맞았는데 이듬해에 7209년이 아닌 1701년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시간 역시 1에서 17까지 숫자가 표기된 시계를 이용해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하루를 확인하던 당시 기준을 없애고 0에서 12시까지 표기된 서구의 시계를 사용하도록 했다.

표트르 대제가 이런 제도를 발표할 때마다 러시아의 전통을 따르던 국민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유산을 버렸다고 거센 비난을 하기도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내용을 꺼내 들자 국민들 사이에 진짜 표트르 대제는 유럽 어느 나라에 잡혀 있고 얼굴이 똑같이 생긴 이단이 대신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표트르가 정말 큰 그림을 그린 것이 있었는데 바로 수도를 옮기는 일이었다. 오랜 러시아 역사와 문화가 서려있는 모스크바를 벗어나 자신이 경험한 유럽과 가까운 곳에 아예 새로운 도시를 세워 전혀 다른 수도를 만들고 싶어 했다. 그곳이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다. 그는 1701년 핀란드만과 네바강이 만나는 땅에 수도를 건설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반발은 그 어느 때보다 거셌다. 당시 이곳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늪지대로 황무지와 같은 데다 오랜 기간 러시아에 대적했던 스웨덴과 지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트르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작은 섬과 섬을 다리로 연결해 열악한 환경을 역으로 이용해 무역과 상업 중심지로 만든 걸 경험했던 터라 이곳을 개발해 러시아의 거점으로 만들 계획을 품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그대로 강행했고 신도시 사업은 본격화됐다. 한쪽에선 폭군이지만 또 한 편으론 개혁자이기도 했다.

도시를 새로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늪지대의 많은 부분을 매립해야 했고 쓰임에 따라 많은 건물과 광장, 거리 등을 새로 조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을 돌며 직접 몸으로 일하며 배웠던 표트르는 새로운 수도를 만드는 일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호화로운 모스크바 궁전을 마다하고 작은 오두막에서 생활하면서 공사의 전 과정을 점검했다. 그는 오두막에 코트 한 벌과 나침반, 작은 보트 정도만 둘 정도로 검소했다고 한다.

9년의 작업이 마무리되면서 어느 정도 틀이 잡히자 1712년 표트르는 이곳을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의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선포하고 수도를 옮겼다. 이전에 없던 유럽식 러시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