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eland
비온 뒤의 청명함을 닮은
중세도시 킬케니

아일랜드에서 길 떠나는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비가 퍼붓고 있는 상황이어도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밀크 티 한잔 마시며 잠시 기다리면 예쁜 무지개와 함께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킬케니에 가기로 한 날 아침에도 눈을 뜨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야 곧 그치겠지만, 비오는 날에 혼자 고속도로를 달려본 적은 없기에 조금 걱정이 되어서 타이어는 괜찮은지, 길은 잘 찾을 수 있을지 지도를 또 체크한다. 모처럼 금요일에 휴가가 생겨서 2박 3일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짧은 일정으로 인근의 유럽 도시를 다녀올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편하게 운전하며 다니고 싶어서 더블린 근처 도시를 물색해 보던 중 눈에 들어온 도시는 킬케니(Kilkenny). 돌아오는 길에 킬데어(Kildare)의 아울렛 쇼핑몰에도 들를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달리면 더블린에서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도시 킬케니는 13세기부터 중세도시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중세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아직도 곳곳에서 전해지는 킬케니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하늘은 맑음이었다. 비온 뒤의 청명한 하늘에, 바람마저도 더욱 시원해진 느낌이다. 킬케니 성 근처에 차를 대고, 1190년대에 세워진 이 성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1390년대부터 약 500년간 이 도시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던 버틀러(Butler) 일가가 살았던 곳, 어쩌면 더블린 성보다도 더 화려한 듯한 킬케니 성을 둘러보면 그들이 얼마나 호화로운 삶을 누렸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겉에서 보기에는 둥근 드럼 형태의 타워를 직사각형의 벽으로 이은, 어찌 보면 투박하기까지 한 성의 외형과는 달리 호화스러운 응접실과 차이나 스타일의 침실, 갤러리의 독창적인 천장 디자인과 당시로서는 최신 시설이었을 수세식 화장실까지 갖추고 있다. 성을 둘러보려면 입구에서 가이드와 함께 그룹으로 입장해야 하며, 1시간 동안 가이드의 설명과 함께 돌아보는 코스로 구성되어 있으니, 굳이 성 내부를 구경하지 않아도 괜찮다면 성 앞마당이나 뒤편의 정원에서 쉬는 것도 괜찮겠다.
성을 나서면 맞은편으로 보이는 킬케니 디자인센터를 구경해보자. 이곳에서는 아일랜드 전통기법으로 만든 각종 액세서리를 비롯하여 도자기, 스웨터 등을 한눈에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인작가들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전시회도 자주 열린다. 여러 지방의 디자인센터 중에서도 킬케니 지방의 디자인센터는 그 독특한 기법의 도자기나 액세서리 디자인으로 유명하여 아일랜드 전역에 퍼져 있다. 킬케니 디자인센터 2층에 위치한 카페에서는 간단한 점심을 먹을 수도 있다.
조금 더 격식 있는 분위기를 원한다면 레스토랑 주니(Zuni)를 추천한다. 아일랜드 잡지에도 자주 거론되곤 하던 이 레스토랑은 조금 비싼 편인 저녁 메뉴에 비해 점심 메뉴는 9~12 유로 정도의 비교적 가벼운 가격대로 구성되어 있어 절충된 가격으로 격식 있는 레스토랑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셰프가 특별히 추천했던 웜 포크 벨리(Warm Pork Belly)는 캐러멜 양파소스에 절인 돼지고기의 달콤하고도 고소한 맛과 그뤼예르 치즈로 만든 리조토의 느끼하지 않은 담백함, 루바브소스의 상큼함이 어우러져 과연 아일랜드 남동부일대 최고의 레스토랑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킬케니를 유명하게 하는 것이 또 있다면, 그것은 이 작은 마을에 80개가 넘는 펍이 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 단연 맥주가 아닐까 싶다. 아일랜드 어딜 가든 펍이 많다지만, 킬케니는 스미딕(Smithwick)이나 킬케니 맥주(Kilkenny Irish Beer)의 원산지로 유명하다. 1710년부터 킬케니에서 맥주를 만들기 시작한 키틀러스 인(Kyteler's Inn)이나 마블 시티 바(Marble City Bar) 같은 곳은 이미 여행자에게도 유명한 곳이 되었다.
여행의 묘미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길을 잃고 헤매다 다다른 어느 작고 예쁜 골동품 가게나, 닳아서 반들반들해진 돌길에 새겨진 여행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만나게 되는 작은 음악회, 거리를 채우는 거리의 악사들의 아이리쉬 휘슬 소리, 반조(Banjo)와 기타의 선율과 바이올린 연주 소리. 골목마다 또 다른 풍경의 중세 도시를 걷다 보면 혼자 있어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