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of Old Istanbul

이스탄불, 그 찬란했던 기억 속으로

아주 오래된, 돌보지 않아 허물어진 이스탄불의 뒷골목을 걷다 보면 눈에 보이지 않던 또 하나의 도시가 마음속에 그려진다.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야에서 색깔을 걷어내고 상상을 환상으로, 다시 그 환상을 실체로 옮겨내면 눈부시게 화려하고 웅장했던 대제국, 그 찬란했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의 몰락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나둘 사라졌지만, 웅대한 사원과 시간이 부여한 도시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날을 고스란히 기억하게 한다.

글 함희선 사진 함희선, 박상웅 기자 취재협조 이콘이벤트 www.ikonevents.com

살면서 경험하는 것들의 의미가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 기억화 되곤 한다. 책을 읽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고서 열정적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내가 실제로 겪은 사실마냥 굳게 믿게 되는 것. 마치 내가 돌잡이에서 만 원짜리를 움켜쥔 후 들었던 가족들의 환호성을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리는, 그 증명할 수 없는 기억에 대한 믿음과도 같은 것이다. 아마도 어른들이 전해준 이야기가 셀 수 없이 반복되고, 또 저장되어 어느샌가 진짜 기억처럼 내 안에 스며든 것일 텐데. 이스탄불에 푹 빠져들었던 며칠이 꼭 그랬다. 그 도시에 머물며 소유하게 된 나의 기억이 그 어린 시절 돌잡이에 대한 기억과 닮았으므로.

우리는 현대문명의 혜택으로 단 몇 시간이면 비행기를 타고 새로운 세계를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대륙을 건너 날아간 그 단 숨의 시간처럼 빠르게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수 천 년의 세월 동안 무수히 많은 문명이 명멸한 터키, 더욱이 대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이라면 말이다. 난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것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입과 글을 열심히 빌어 이 도시와 친해져야 했다. 비록 머릿속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터키에 관련된 책을 몇 권 읽고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주 오래전 그날의 사람들도 똑같이 밟았을 그 땅을 거닐며 바닷내음 가득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시간이 조금씩 지나는 동안 그 이야기들은 어느새 상상이 되고, 또 환상이 되어 내 머릿속을 빙빙 돌아 구석구석 기억을 심어 놓았다. 모르는 것일수록 내 상상은 거대해졌고, 환상은 더 황홀해졌다. 경건한 아잔소리 대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울려 퍼지는 모스크 안에서도 메카를 향해 머리를 숙인 이슬람교도들의 행렬을 보았고, 술탄을 태운 화려한 나룻배 대신 관광객을 태운 페리가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쉴 새 없이 오가는 보스포러스 해협에서도 내 귓가에는 파도에 부딪히는 노 젓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왔다. 나의 모자란 지식과 둔감한 오감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오르지 않으면 겪을 수 없는 일들이 마침내 내가 소유하게 될 기억이 되었다.

비잔티움과 콘스탄티노플로 알려졌던 거대도시 이스탄불은 지금의 뉴욕이나 파리를 뛰어넘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의 몰락으로 그 영광스러운 모습은 하나둘 사라졌고, 역사상 가장 우울하고 가난했던 20세기를 겪은 뒤 서구화의 물결에 뛰어든 이 도시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온전히 나의 힘과 능력만으로 오래 전의 그날을 보는 게 쉽지 않았던 이유다. 눈부시게 화려하고 웅장했던 옛 자취와 추억을 위해서 나는 눈을 뜨는 대신, 감는 것을 택했다. 그렇게 마주한 이스탄불의 빛바랜 과거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글을 위해 이스탄불을 회상하는 지금에도 나는 한 달 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의, 기억조차 할 수 없도록 오래된 그날이 그리워진다.

Walking in Old City
전형적인 이스탄불 산책
이스탄불의 오래된 거리를 걷다 보면 작은 기둥조차도 의미 있게 느껴진다. 도시가 품고 있는 오랜 과거의 묘한 기운 때문이리라. 몰락한 대제국이 남긴 이스탄불의 역사는 숨죽인 채 박물관에 박제처럼 전시되어 있지 않다. 과거의 힘과 부유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그들이 사는 삶 속에 머물러 있다. 블루 모스크, 아야소피아 성당, 톱카프 궁전, 그랜드 바자르로 이어지는 조금 뻔하고 전형적인 코스이지만, 이스탄불을 이해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산책은 없다.

성지순례의 첫 출발지
“아잔소리가 이토록 고요하게 울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어쩌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가던 길을 가는 거죠?”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하는 신실한 이슬람교도를 상상하던 내게는 조금 황당한 장면을 맞닥트렸다. “터키의 이슬람교는 아주 관용적이에요. 온건하고 타협적이며 현실주의적인 색채가 강하죠. 사람들도 비교적 자유분방한 종교생활을 영위합니다. 이스탄불 사람들은 보통 금요일에만 모스크에 가요. 젊은이들 중에는 예배를 아예 보지 않는 사람도 있답니다. 다른 나라의 무슬림들이 본다면 펄쩍 뛸 일이죠.” 도시의 일곱 언덕 위로 우뚝 솟은 모스크들이 만들어낸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에 흠뻑 반해버린 다음이라 가이드의 친절한 설명에도 난 괜한 실망에 빠져버렸다. 터키는 인구의 98퍼센트가 이슬람교를 믿는다. 매일 기도를 하고 메카순례를 염원하는 신실한 교인들이 존재하지만, 번잡한 대도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모스크에 가기를 포기하는 이도 있다. 물론 그들도 여전히 이슬람교의 교리를 지키며 명절과 축제를 충실히 지킨다. 이슬람교도라면 누구나 꼭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이 있다. 신앙 고백, 매일의 기도, 자선, 라마단 기간의 단식, 그리고 메카순례. 일생에 한 번은 꼭 메카에 가야 하는데, 이스탄불 사람들에게는 이 블루 모스크Blue Mosque가 바로 그 성지순례의 첫 출발지로 여겨진다.

이스탄불의 역사가 겹겹이 쌓여있는 곳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이었던 아야소피아 성당은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이 점령하면서 모스크로 바뀌게 된다. 거대한 돔형의 지붕이 있으니 그 모습은 모스크로 바꾸기에 무리가 없었을 테지만, 전설적인 성당이 모스크로 바뀌다니 이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던 일인가. 그러나 메카 방향을 나타내는 아치형 벽관과 첨탑 미나레트를 설치하면서 성당은 곧 모스크로 바뀌었다. 예수를 그린 아름다운 모자이크화는 종교적 특성상 생명의 모사를 금지하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석회를 발라 역사 속에 묻히게 되었고. 그런데, 이런 걸 덕분이라고 해야 하나 없애려고 바른 석회 탓에 복원을 마친 모자이크는 반짝반짝 새것처럼 빛을 내고 있으니. 오랜 보수를 마친 지금은 성당으로서의 흔적과 모스크로서의 흔적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아야소피아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 어떤 역사책보다 아야소피아를 보면서 그 시기를 몸소 느낄 수 있는.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종교적인 기능을 하지 않는 박물관이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후 유럽각국이 아야 소피아의 반환과 종교적 복원을 강력하게 요구했을 때, 터키 정부는 이곳을 박물관으로 바꾸고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어떤 종교적 행위도 금지했다.

오! 술탄의 아름다운 궁전이여
‘술탄’이라는 단어는 왠지 왕이라는 칭호보다 더 막강하고 한계 없는 존재의 의미로 다가온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대제국을 다스리던 술탄이기에. 술탄Sultan의 뜻은 이렇다. 이슬람교의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 정치가 종교의 힘을 등에 업었으니 그 권력이야 얼마나 대단했을까. 술탄이 본격적으로 이슬람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오스만제국의 술탄들 중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잠식하며 이슬람의 세력 확장의 기틀을 마련한 무라드 1세 때부터다. 그 이후부터 술탄은 이슬람세계의 최고 수장권자의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마지막 술탄이 국민대의회에 의해 술탄지위를 빼앗기게 되는 1922년까지 총 30명의 술탄이 제국을 통치했다. 오스만제국의 그 강력한 통치자였던 술탄들이 거주하던 궁전이 바로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Topkapi Palace이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정복자 메흐메트가 1453년에 지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역대 술탄들도 19세기 보스포루스 해협 해안에 지은 화려한 유럽풍 궁궐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이 궁전에 기거하며 속세와 단절된 채 살았다.

지붕 밑 또 하나의 세상
그랜드 바자르는 정복자 메흐메트 2세의 술탄시대에 마구간 자리에 들어선 석공들의 작은 실내시장으로 시작했다. 지붕을 만들고 확장하면서 250년 전쯤 지금의 거대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이 시장에는 성벽처럼 거대한 입구가 여러 개 있는데, 밤이면 문을 꽁꽁 잠근다. 아침이면 사라졌다가 밤이면 사라지는 또 하나의 세상인 셈이다. 60개 이상의 통로와 5천여 개의 상점이 마구 뒤엉켜 미로를 이루고 있어 아무리 뛰어난 방향감각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 능력이 발휘되기 어렵다. 그랜드 바자르 탐방은 오히려 길치인 내게 천국이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마음껏 길을 잃고 구경을 할 수 있었으니. 토산품, 금은보석, 장식품, 양탄자, 도자기, 차 등 신기한 것투성이지만 고객이 관광객이 대부분인지라 가격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 강매는 없지만 갖가지 호객이 활개를 친다. 이스탄불을 여행할 때의 최대 단점인 터키어 구사불가도 여기서는 괜찮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호객꾼과의 대화는 이스탄불 시민과 가장 가깝게, 가장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다. 게다가 도시전체에서 이따금 한국어로 반가운 인사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여기가 유일하지 싶다.

이스탄불의 혼과 힘의 원천 보스포러스
보스포러스 해협은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고, 지중해와 흑해가 만나는 아주 대단한 의미를 품고 있다. 18세기와 19세기의 보스포러스에는 카이크라고 부르는 나룻배들이 가득했었다. 이슬람 최고의 통치자인 술탄과 그의 신하들이 탄 배가 궁궐에서 정자까지 힘차게 물살을 가르고 나아갔었다. 지금은 나룻배대신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푸른 바다를 누빈다. 1973년 보스포러스 대교가 지어지기 전까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는 방법은 오로지 배였다. 그 매력에 취한 사람들은 여전히 페리를 타고 하루에도 수 십 차례 두 대륙을 오간다. 1시간 30분 만에 유럽과 아시아의 대륙을 오가는 마법 같은 공간이동. 땅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내 마음도 출렁이게 할 만큼 멋지고, 또 바다에서 바라보는 땅은 도시를 마음에 꽉 차게 담아갈 수 있는 광활한 풍광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