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iwan :: Tainan

Tainan

The Historical City of Taiwan

타이완의 시작, 역사의 중심에 타이난이 있다
낡고 낮은 건물들 사이, 기대하지 않고 걷는 골목길에 서려 있는 역사와의 우연한 만남이 즐거웠다. 특별한 노력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안핑지구와 타이난 시내를 걸었을 뿐이다. 오래된 낭만이 깃들어있는 도시, 타이난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김수현 기자 사진 임성훈 기자 취재협조 타이완관광청 www.taiwan.net.tw, 스쿠트항공 www.flyscoot.com

타이난을 알기 위해 역사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타이완이 역사상에 드러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인 1624년, 네덜란드인이 타이난 지역에 상륙하고 나서부터다. 그 이전에도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나라를 형성한 것이 아니었고 따로 떨어져 마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단다. 17세기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타이난을 거점으로 삼아 타이완 섬을 점유했다.
37년간의 지배는 타이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정성공鄭成功에 의해 끝이 났다. 1661년에 처음으로 공격을 시도했고 이듬해 타이완에서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냈다. 이 땅에 독립된 국가가 건설된 것은 이 시기가 처음. 이후 200년간 청나라의 지배와 50년의 일본 식민통치가 이어지며 많은 것이 변했다. 변화의 물결에도 타이난은 가장 먼저 개발을 이룬 타이완의 중심도시였으며 비록 일본 통치 시절에는 수도의 역할이 타이베이로 옮겨졌지만 오랫동안 제2의 도시로 남아있었다. 타이완 모든 역사는 시작부터 현재까지 언제나 타이난과 함께였다. 건물 한 채, 골목 하나에도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이유다.

타이완 역사의 압축판, 안핑지구

타이완의 역사는 곧 타이난이고 그중에서도 안핑지구安平地區에서 시작됐다. 안핑이 역사와는 별개로 특이한 점이 있다면 19세기까지 타이완 본토와는 분리된 작은 섬이었다는 거다. 해류의 작용으로 섬과 섬 사이 석호가 메워져 본섬의 일부가 됐고 덕분에 자동차와 셔틀버스를 타는 것으로 역사를 만나러 갈 수 있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안핑구바오安平古堡. 젤란디아라고도 불리며 도시 방어를 목적으로 네덜란드에 의해 세워진 요새다. 1662년 정성공이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낸 이후에도 건물을 폐쇄하지 않고 정부기관으로 사용했다. 안핑구바오에서 이전 요새로서의 모습을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성벽 일부만이 붉은 벽돌로 남아있을 뿐, 나머지 박물관과 전망대로 쓰이는 건물 등은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낡은 벽을 드리운 나무와 그 위로 피어나는 잎사귀는 이곳이 여전히 안핑의 역사와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게끔 한다.

안핑구바오와 비교했을 때 이자이진청億載金城은 당시의 모습을 상당 부분을 재현했다. 타이완 최초의 현대식, 서양식 요새로 청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축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울릴 정도로 높고 긴 아치형 문을 지나면 요새의 위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앙 정사각형의 공터는 300쌍이 한 번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초지지만, 과거에는 연못이 있어 실수로 포탄이 뒤쪽으로 떨어져도 안심이었다고. 이자이진청 곳곳에는 대포가 설치되어 있다. 한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1975년에 만들어진 복제품이지만 매우 정교하다.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담당한 요새였기 때문일까. 벽돌 하나하나가 정확한 각을 맞춰 쌓여있다.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는지 이 중 일부는 안핑구바오에서 빼 오기까지 했단다. 억년을 지켜줄 정도로 강해 이름에 억재億載라는 한자가 있는데, 지금은 대포가 있음에도 한적한 공원처럼 보인다.

안핑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17세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거점도, 청일전쟁 이후 일본통치시기 중국과의 교역지점도 모두 안핑이었다. 타이완 최초의 항구도 이곳에 세워졌으므로 상인들은 안핑을 시작으로 타이완에 뿌리를 내렸다. 안핑수우安平樹屋는 영국인이 세운 5대 무역회사 중 하나인 더지양항德記洋行의 창고건물. 일본강점기에는 소금회사의 창고로 사용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이 지역의 소금산업이 경쟁력을 잃어 오랜 세월 그대로 방치됐다. 많은 사람이 회사건물보다 바로 옆 창고를 찾는 이유는 아마도 반얀나무 때문일 거다. 아름답다기보다 기이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나무들은 네모난 창고의 형태를 따라 자랐고 뿌리까지 90도로 꺾어 건물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맑은 날에도 빛이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니 울창한 숲 속에 있는 기분이다. 아주 오래도록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자연이 만든 이채로운 풍경에 푹 빠져 이슬비가 내리는지도 모른 채 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1 무역회사 더지양항의 건물. 꼬마들이 단체로 견학을 왔나 보다.
2 이자이진청 전경으로 이 다리와 문을 지나야 이자이진청이 보인다. 요새답게 주변은 해자로 둘러있다.
3 현재 안핑구바오의 건물 대부분은 네덜란드인들이 지은 것이 아니다. 전망대에서는 안핑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다.
4 이자이진청 내의 대포.
5 안핑수우에서 여대생들을 만났다. 밝은 친구들의 표정과 뒤쪽으로 기이한 배경이 묘하게 잘 어울린다.
6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정성공 동상. 사진 속은 안핑구바오에 있는 것이다.
7 안핑지구안에도 옛거리가 있다. 이름은 옌핑제.

1 마음을 다해 마주에게 기도를 드리는 도교신자. 아주 오랫동안 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2 츠칸러우 건물 내에 있는 화병 모양의 문으로 핑안문이라고 부른다. 이곳을 지나가는 모두가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3 사원은 마을의 경조사를 항상 함께한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이런 사원 하나쯤은 볼 수 있다. 사진 속은 소남천이라는 곳으로 재물신을 모시고 있다.
4 기도를 드리러 온 사람들의 행동은 비슷하다. 향을 피우거나 점을 치거나. 아니면 둘 다 하거나.
5 높은 직위의 네덜란드 사람이 거주하고 업무를 보기도 했던 츠칸러우.

길에서 만난 타이난의 이야기

타이난에서 머무르는 동안 안핑지구로 갈 때를 제외하고 차를 타고 이동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보고, 느끼는 것이 유난히 많았던 까닭은 길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긴 건물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타이난을 대표하는 건축물 츠칸러우와 타톈허궁이 있는 길이 그렇다. 츠칸러우赤.樓는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초기에는 네덜란드의 요새로 활용되었으며 정성공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전쟁과 지진으로 인해 안핑구바오처럼 네덜란드인이 남긴 것은 붉은 성벽이 전부고 대부분은 청나라 점령 당시에 지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츠칸러우 주변에는 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건물 내부에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문의 신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붉은 성과 초록색 야자수, 건물 밖에 일렬로 세워진 오토바이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맞은편에 위치한 타톈허궁大天后宮은 바다의 여신 마주를 모신 사당이다. 섬나라에서는 마주 여신이 많은 사랑을 받는데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타이완 전역에 마주 사당만 400여 개. 그중에서도 타톈허궁은 가장 정교하고 아름답기로 정평이 나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주 신에게 축복을 받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마주의 기운을 받기 위해 다른 사찰에서 신자들이 단체로 오기도 한다. 기도 후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평온해진 얼굴을 보니 축복의 기운이 전해오는 듯하다. 중앙에 앉아있는 마주신을 지나 뒤편으로 가면 또 다른 사당과 이어진다. 남녀의 사랑을 이어주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 있는 공간. 일행을 먼저 보내고 난 뒤 궁합을 점치고 있는 여자 옆에서 몰래 기도를 올렸다. 비록 도교 신자는 아니지만 인연의 실로 이어져 있을 누군가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서. 길을 걷다 마을 중간에 있는 사원에 들러 신에게 기도하고, 평범한 도로 옆 역사적인 건축물을 매일같이 만날 수 있는 곳. 타이난의 길은 이렇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기에 그 어떤 곳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예외 없이.

1 션농제에는 특색있는 가게가 많다. 이곳은 아마 잡동사니를 파는 곳쯤 되려나.
2 3 해안로를 따라 그려진 벽화들. 이 두 벽화를 지나면 션농제 입구가 있다.
4 타이베이에서 놀러 온 커플이다. 사진 한 장을 부탁했을 때는 시큰둥해하더니 이내 멋진 표정만을 보여주더라.
5 7 션농제의 낮은 밤에 보는 느낌과는 또 다르다. 6 길에서 만나 함께 걸었던 토니의 작업실에서 본 작품. 백수라고 이야기했지만 책도 여러 권 펴낸 꽤 유명한 작가인 듯하다.
8 짧은 션농제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면 여유로운 타이난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예쁜 길보다 더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같이 걷는 옛길, 션농제

시내의 해안로海安路를 중심으로는 음식점들이 모여있다. 타이완에서도 맛있는 음식이 많기로 소문난 타이난. 저녁이면 주민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는 집이 많은데, 무엇이 제일 맛있다고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그들 뒤에 줄을 서면 반은 성공인 셈이다. 해안로 주변의 강렬한 냄새에 킁킁대는데 벽화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후각보다 시각에 집중하며 예쁜 벽을 따라가보니 세월이 묻어나는 골목길 하나가 있더라. 타이난의 옛
거리 션농제神農街. 아기자기햔 샵들을 하나씩 구경하고 카메라 렌즈를 통해 찻집을 보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허락 없이 촬영을 해서 화가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에 사과를 하려 했는데, 이게 왠걸? 다짜고짜 이곳이 처음이냐며 꼼꼼한 설명을 덧붙여 가이드를 자청하는 것이 아닌가. 얼떨결에 생긴 자칭 토니라는 가이드에 따르면, 오래된 집들 2층에는 대부분 난간이 있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 거리가 청나라 시대에 물길이었기 때문이란다. 좁은 길 사이로 배가 다니며 위층에서 물건을 올리고 내렸고 안핑에서부터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단다. 지금의 션농제에는 레스토랑, 카페, 레코드숍, 점집까지 다양한 먹거리, 볼거리가 있다. 벽화가 있는 이유도 함께 물었는데 이 주변으로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션농 예술거리라고 불리기도 하고. 토니 역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지만 그의 말을 빌리자면 사실상 백수와 다름없어 오후 시간에는 찻집에서 천천히 시간을 보낸다더라. 얼떨결에 그의 작업실과 방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결코 어떤 목적이 있는 호의가 아니었다. 그저 타이난을 보여주고 싶은 순수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션농제 자체는 매우 짧지만 계속 이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옛 가옥들과 함께 타이난 주민의 삶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 새로운 풍경은 낯설지만 길에서 느낀 건 편안함이었다. 기자가 처음 션농제에 간 것은 깊은 밤이었지만 그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를 둬서라도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예쁜 가게를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낮 시간의 이곳은 어떻게, 얼마나 다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만난 토니와 함께 골목 구석구석을 탐방했다. 잠시 들렀다면 절대 보고, 듣고, 경험하지 못했을 것들. 그렇기에 션농제에 간다면 길 끝에 보이는 사원에서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그곳을 시작으로 그저 발이 닿는 대로 자유롭게 걷기를 추천한다. 단언컨대 타이난을 만나는 가장 낭만적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