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새로운 발견 - 뚜르드몽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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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러시아] 도시분류 : [캄차카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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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톨바치크 화산(Tolbachick, 3582m)의 일몰

톨바치크 화산(Tolbachick, 3582m)의 일몰

Survival in Klyuchevskaya Sopka

클류쳅스카야에서 살아남기

2018년 가을 나는 군대에 있었다. 차차 말년을 바라보던 시기에 미래에 대한 깊어가는 고민으로 밤잠을 설친다. 군복무라는 또 하나의 긴 여행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사회의 쓴맛을 보기에 앞서 특별한 경험으로 자존감을 되찾고 싶었다. 화산을 탐험하기로 했다. 시시콜콜한 그저 그런 화산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꿈틀꿈틀 땅이 움직이고 돌멩이들이 날아다니고 분화구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 러시아 캄차카 반도의 클류쳅스카야 화산(Klyuchevskaya Sopka, 4750m)은 그런 화산이었다.

남준식 / 부천시 원미구 상동

20대 대학생. 일과 놀이가 하나인 삶을 추구한다. PD가 되어 자연과 인간 사이의 문화를 조명하고 기획하고 싶다.

창밖으로 보이는 클류쳅스카야 화산

클류쳅스카야 원정대

비용적인 측면에서 혼자서는 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 화산 등반을 취급하는 유일한 여행 에이전시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대개 지원자가 거의 없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성사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바탕의 꿈이었구나’하며 애써 미련을 지워가던 2019년 3월, 메일 한통이 날라 왔다. 세 명이 등반을 희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짜를 조정하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클류쳅스카야 원정대가 탄생한 것이다.

클류쳅스카야 화산에서 바라본 카멘 화산 현란한 타이틀, 초라한 커리어

클류쳅스카야는 유라시아와 캄차카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이다. 지구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클류쳅스카야는 근래에는 거의 매년 분화하고 있다. 본래 5000m이었던 높이는 2000년 폭발로 인해 250m가 통째로 날라가 현재의 4750m가 되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국내 등반 기록을 찾아보았다. 94년도에 산악인 엄홍길이 지역산악회에서 등정한 바가 있었다. 이것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90년대이지 정보통도 교통도 빈약하던 정말 오래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가이드와 헬리콥터에서

내가 짐작키로 우리나라의 클류쳅스카야 등반 역사는 그 90년대에 멈추어 있을 것이었다. 한국인으로서 25년 만에 클류쳅스카야를 오르는 21세기 첫 주인공은 내가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에 설렜다. 정작 나의 고산등반 경력은 3년 전 킬리만자로를 오른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틈틈이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도스도옙스키의 ‘죄와 벌’도 읽으면서 어느덧 군복무를 마쳤다. 그리고 7월, 적금통장을 털어 러시아 캄차카 반도로 떠났다.

열흘치의 식량과 장비를 싣고

헬리콥터까지 뜰 줄이야

인천에서 캄차카의 주도, 페트로 파블롭스크 캄차츠키까지는 직항이 없기 때문에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롭스크에서 환승을 해야 한다. 내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캄차카에 내렸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피곤함에 절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뻗고 말았다. 가이드의 노크소리에 눈을 떴다. 숙소로 찾아온 가이드는 장비를 점검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초라한 장비로 말미암아 초짜행세를 보이는 나를 쳐다보는 얼굴에서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집에서 플라스틱 부츠, 크램폰(아이젠), 텐트, 침낭, 헬멧, 아이스 액스(피켈)를 빌렸다. 곰들이 연어를 잡아먹는 풍경으로 모사되는 쿠릴호수와 세계적 규모의 간헐천 계곡은 캄차카에서 대표적인 인기 여행상품이다.

카멘화산(Kamen, 4580m, 좌), 클류쳅스카야화산(Klyuchevskaya Sopka, 4750m, 중), 베지미아니화산(Bezymianny,2882m, 우) 이들은 페트로 파블롭스크 캄차츠키에서 곧장 헬리콥터를 이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접근성이 편하다. 반면 클류쳅스카야의 관문마을인 코지르브스크나 클류치로 가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500km를 냅다 달려야 한다. 9시간을 달려 도착한 작은 마을에서 다시 헬리콥터를 타고 20분을 날아갔다.

처음 타보는 헬리콥터에 신나는 기분을 주체할 틈도 없이 해발 3400m, 클류쳅스카야와 카멘(Kamen, 4580m)사이의 골짜기에 내렸다. 헬리콥터가 떠나자 클류쳅스카야의 그림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손에 잡힐 듯 다가갈수록 멀어져만 가는 것이 아늑하면서도 치명적인 존재 같았다. 완벽한 원뿔의 자태와 정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산가스에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가 흐려졌다.

저 푸른 툰드라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소비에트 클럽

열흘 간 내 달팽이관에는 러시아어가 쉴 새 없이 맴돌았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 러시아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한 명은 모스크바에서 왔으니 당연할 터이고, 나머지 두 명은 각각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서 왔는데, 두 나라 모두 CIS국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의 언어는 러시아어와 흡사했다.

구소련 변방의 캄차카에서 언어의 파급력에 대해 생각할 때, 한때 세계패권을 쥐었던 이 나라의 광활한 영토를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와 열 살 터울의 가이드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못하는 것이 없는 그는 캄차카의 김병만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영어로 통역해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하루는 기초가 없는 나에게 크램폰과 피켈 사용법을 일대일로 훈련시킨답시고 카멘 빙벽을 함께 올랐다. 훈련도중 내 다운재킷이 찢어지는 바람에 마치 웰컴투동막골에서 팝콘이 내리는 장면처럼 한 움큼의 깃털이 공중에 흩날렸다. 아, 슬픈 아름다움이었다. 지금도 그 순간이 뇌리에 남아있다.

톨바치크 화산(Tolbachick, 3582m)을 향해 고산등반에 있어 동양인이 불리한 이유

추위? 체력? 고산병? 모두 아니다. 나는 음식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주일동안 햄, 치즈, 빵, 수프만 먹다보면 어느새 식음을 전폐하는 본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입맛에 맞지 않는 러시아식 죽 카샤를 매일 먹을 때면.. 힘든 시절을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나의 방귀냄새가 며칠 묵은 소똥냄새를 방불케 하는 독가스로 변한 것을 무심코 알게 되는데, 옆 사람이 먼저 알게 되는 사실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마지막으로 입맛 돋우는 발효음식과 파릇한 채소로 가득한 한식이 얼마나 위대한 음식문화를 지녔는지 깨닫게 된다. 칼칼한 김치찌개가 그렇게 먹고 싶을 수가 없었다.

베이스캠프 무비유환(無備有患): 예정된 실패

결론부터 말하자면 등정에 실패했다. 오래도록 꿈꾸어왔던 도전을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상함과 아쉬움으로 한동안 우울해있었다. 하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돌이켜보니 턱없이 준비가 부족한 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당시 우리가 머물던 클류쳅스카야는 이상한파로 인해 예년과 다르게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영하 20°C까지 떨어졌다. 거센 바람의 영향으로 체감온도는 거의 영하 30°C에 육박했을 것이다.

너무 추워서 잠을 도통 잘 수가 없었다. 내 얇은 침낭으로 그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냉동고 안의 동태처럼 괴롭게 버틴 잠자리는 오한과 두통을 불러왔다. 그래도 나는 절대 포기하기 싫었다. 클류쳅스카야의 경사는 가뜩이나 가파른데 한파로 인해 얼음과 돌이 뒤섞여 매우 미끄러운 상태였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한 번 넘어지면 최소 수 미터 아래로 추락했다. 한손엔 등산스틱을 다른 한손엔 피켈을 쥐고 올랐다. 크램폰을 착용하고 걷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발에 무리가 가는 것을 느꼈다. 특히 발가락뼈에 통증이 심했고 동상에 걸린 듯이 혈액순환이 원활치 않았다. 내색은 안했지만 더 이상 입을 옷은 없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추위 앞에 불안감이 쌓여갔다.

이 상황을 지켜본 가이드는 내 무모한 욕심에서 비롯된 간곡한 청에도 아랑곳 않고 내게 하산을 냉정하게 지시했다. 고작 4000m에서!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고산등반에 잔뼈가 굵은 나머지 팀원들은 등정에 성공했다. 프로일수록 준비는 철저하다. 아니, 철저하기에 프로인 것이다.

모기약은 필수. 고난의 행군
네버엔딩스토리 인 캄차카

베이스캠프에서 마을로 내려가는데 나흘이 걸렸다. 빙하가 녹아 갑자기 불어난 강물을 건넜다. 30kg의 짐을 이고 수많은 협곡과 푸석푸석한 툰드라 지대를 걷고 또 걸었다.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에 어깨와 골반은 죽겠는 와중에 두 눈만큼은 사치를 누렸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나 나올 듯한 풍경들이 줄줄이 두 눈에 담겼다. 연기를 내뿜는 화산과 괴물의 혓바닥처럼 생긴 빙하들, 초록의 이끼가 만들어내는 비현실적인 조화는 과연 내가 상상한 캄차카의 전부였다.

러시아의 위대한 화가 마르크 샤갈조차 이 풍경을 감당할 순 없으리라. 신을 믿지 않지만 그곳에는 신이 있어도 좋았다. 한국에 돌아오니 몸무게가 6kg나 빠져있었다. 이년 동안 꾸준히 운동해서 가꾼 몸이 고작 한 달 만에 망가졌을 때의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 내 인생에서 가장 멋졌던 탐험이었으니까. 그때 먹었던 바바옙스키 초콜릿을 한 입 물고 두 눈을 감아본다. 클류쳅스카야의 시큰한 냄새가 방안에 아른거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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