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TASTE AND FEEL THE SEA

 

붉은 갯벌 너머로 해가 지는 곳, 부안

멋진 낙조가 있는 곳, 거대한 갯벌이 있는 곳, 맛있는 백합조개와 젓갈이 있는 곳. 쌀알 끝처럼 황해로 툭 튀어나온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는 붉은 태양에 눈이 멀고 짭조름한 젖갈에 혀가 얼얼해지는 오감 여행의 요충지다. 진한 멋과 맛을 보려 전북 부안으로 내려갔다.

 

글 전준호 기자 사진 김용기 작가. 뚜르드몽드 포토

 

 

끝없이 펼쳐진 땅은 고운 모래와 자갈, 듬성듬성 머리를 내민 바위들로 가득하다. 변산반도는 국립공원 치고는 조용한 곳이다. 해운대나 동해, 혹은 가까운 서해의 대천해수욕장처럼 휴가철마다 개미떼 같은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지는 않는다. 변산반도가 통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아름다운 갯벌과 바다와 서해 낙조, 내변산(변산반도 내륙)의 아기자기한 폭포와 산과 절 할 것 없이 모두 한번쯤 들러볼 만한 장소로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부안의 반도 끝에서 바다로 16킬로미터만 가면 닿는 위도라는 섬과 반도 북쪽으로 무려 33킬로미터나 뻗은 멀리 새만금 방조제가 있다.

 

 

명불허전, 격포 일몰과 곰소 젓갈

멋진 해넘이를 감상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장소는 해수욕장 남쪽의 채석강이나 북쪽의 적벽강이다. 이태백이 물 위에 비친 달을 잡으러 가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이나 중국 제일의 경치를 자랑한다는 적벽강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곳들인 만큼 저마다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기자가 택한 곳은 북쪽의 적벽강. 채석강이 책을 눕혀놓은 것처럼 층층이 쌓인 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매력이라면 적벽강은 파도처럼 구불거리며 바다를 향해 뻗은 바위가 인상적이다. 날은 맑았지만 수면에 낮은 구름이 깔려 핏방울이 떨어지듯 바다위로 뚝 떨어지는 해를 볼 수는 없는 날이었다. 그래도 하늘이 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서 흑적색 바위에도 불이 붙으니, 천지가 이름 그대로 붉은 벽이 된다.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 덕에 바다 쪽으로 불규칙하게 도열한 바위에도 깊은 그늘이 진다. 흑과 적의 변화가 극에 달하는 순간은 아주 잠깐. 구름 속으로 해가 들어가자 바위의 윤곽은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고 하늘만 더욱 붉어진다.

 

낙조를 뒤로한 채 곰소항으로 향했다. 격포와 곰소를 잇는 구간은 어디에서나 멋진 낙조를 볼 수 있다. 전국 최고 명성의 젓갈을 맛보려 곰소항을 들어서니 “젓갈 맛보세요” 하고, 손님을 부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는 “곰소 젓갈은 곰소 염전에서 나는 천일염을 사용해 쓴맛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이쑤시개로 조금 찍어 직접 입에 넣은 젓갈의 그 맛은 쫄깃하게 씹히는 창란젓과 달큰하게 삭은 굴맛이 입맛을 돋우는 어리굴젓은 뜨거운 밥 한 공기가 절로 생각난다. 젓갈로 입맛을 다시고 나니 배가 더욱 고파온다. 바로 그것을 노렸는지 시장 주변에는 밤늦게까지 불을 밝힌 횟집들이 손님을 모으고 있다. 모듬회와 매운탕은 두 명이 먹기에 조금 많지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취해 뚝딱 해치워 버렸다.

 

바다만큼 아름다운 내변산

변산반도에서 바다만 볼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다. 30번 국도에서 가지를 친 지방도를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아름다운 호수와 폭포와 절을 만날 수 있다. 변산반도의 해넘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낙조대나 수직으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가 인상적인 직소폭포가 있다. 숲길을 따라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의 산책을 곁들여 내변산의 빼어난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으니 꼭 한번 시간을 내볼 만하다. 곰소항 바로 직전의 석포리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내변산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내소사를 만날 수 있다. 내소사는 절 앞으로 난 전나무 숲길로 유명하다.

 

일주문을 지나면서 시작되는 나무 터널은 사천왕상을 지나면 숫제 ‘나무 지붕’으로 변한다. 수령 1천 년짜리 군나무를 중심으로 아름드리나무들이 절 앞마당 전체를 감싸고 있다. 화려하면서 그 기품을 잃지 않은 대웅보전의 꽃살문은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색이 바랜 건지, 처음부터 휘황하게 입히지 않은 건지, 나뭇결과 색깔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람도 숲길과 자연스레 어울린다. 대웅보전 바로 옆, 스님과 신도들이 수행하는 장소였던 설선당 문간에 걸터앉아 편안한 바다와 갯벌과 숲에 흠뻑 젖는 변산반도의 아름다움에 다시 찾아야겠다고 약속한다.

 

꽉 닫힌 껍질 안에 바다를 품은 백합

우리나라 서해 연안에 지천으로 널린 백합. 백합은 그 풍부한 맛과 향으로 오래 전부터 으뜸가는 요리의 재료로 사용되어 왔다. 뭍에 올라오면 절대 열지 않는다는 그 껍질 속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그토록 빼어난 맛을 가진 걸까? 백합은 얕은 바닷물의 갯벌 속에서 나고 자란다. 어릴 때는 조금 더 깊은 곳에 있다가 성장을 할수록 더 얕고 민물 성분이 많은 강 하구와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올라와 자리를 잡는다. 그러니 맛 좋은 백합을 찾으려면 넓은 갯벌을 가진 바다와 맑은 물을 가진 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서해안으로 툭 튀어나온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는 그런 의미에서 천혜의 백합 산지다. 반도 북쪽으로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흘러들어오고 서해의 드넓은 갯벌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곳의 으뜸가는 특산물로 주저 없이 백합을 꼽았고 멀리 조정의 임금에게까지 진상되었다. 요리 재료로서 백합의 장점은 조개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고 해감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조개를 비롯한 어느 해산물이든 약간이라도 바다 특유의 비린내 같은 것이 나기 마련인데 백합에는 그게 없다. 잡아서 그냥 바로 먹어도 될뿐더러 모래가 씹히는 일도 없다. 그러니 회로 먹고 구워서 먹고 쪄서 먹고 끓여서 먹고, 백합을 요리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나올 수밖에. 원하는 맛을 낼 자신만 있다면 백합은 어떤 요리에든지 큰 고민 없이 적용시켜 볼만 하다. 조개 중에 이만큼 어느 요리에나 어울리고 맛과 향이 뛰어난 것은 값비싼 전복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굽고 끓이고 찌고, 백합을 먹는 여러 가지 방법

백합이 많이 나는 변산반도를 돌아보면 어디서나 백합 요리를 하는 식당을 찾을 수 있다. 부안의 대표 메뉴인 백합죽은 노르스름한 죽 위에 참깨와 잘게 부순 김이 얹어져 나온다. 죽의 색깔은 다른 지방에서 보았던 백합죽의 색과 상관없이 풍겨 나오는 백합 특유의 향기는 침을 꿀꺽 삼키게 만든다. 김과 참깨를 자박자박 비빈 다음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어보니 진한 향기에 걸 맞는 진한 백합 맛이 입안을 채운다. 입맛 없는 아침이나 소화가 잘 안 되는 때에 이런 죽 한 그릇이 있으면 얼굴을 찌푸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백합은 영양 많은 고단백 식품이면서 위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고 내장을 보(補)하는데 좋아서 죽이라 해도 한 끼 대용으로 손색이 없다. 무엇보다 고소하면서 향긋하고 달착지근하게 입에 붙는 맛이 일품이다.

 

뽀얀 국물 속에 백합이 입을 쫙 벌리고 있는 백합탕도 단 한 숟가락만으로 감탄사를 내뱉게 만드는 요리다. 조개를 이용해 음식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실 시원한 조개탕이나 조개국이야말로 모든 주당들의 ‘로망’ 아닌가. 머리 지끈지끈한 술자리 다음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흐린 국물 한 접시면 ‘하아아’ 하고 굵은 신음이 절로 나오지 않던가. 백합도 그런 탕이나 국의 재료로 최고의 맛을 보여준다. 뭍에서 그렇게 꼭꼭 닫아 잠그고 있는 껍질 안에 무엇을 감추고 있었나 했더니, 백합탕에서 비로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시원한 국물 한 모금이면, 입안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것이다. 쏴아 하는 파도소리의 상쾌함, 탁 트인 수평선의 시원함, 뺨을 어루만지는 바닷바람의 청명함이 백합 속에 모두 들어 있었다. 본인도 모르게 ‘하아아’가 아니라 ‘으아아아’ 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더 큰 문제는, 그와 동시에 술 한 잔 생각이 또 난다는 것이었지만.

부안에서 맛볼 수 있는 백합요리는 죽과 탕 말고도 많다. 이번엔 백합구이. 입을 다문 백합을 은박지로 잘 싼 뒤 구워낸 것이다. 뜨거운 차돌 같은 은박지를 조심스레 떼어내면 툭 하고 백합이 입을 열어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린다. 껍질 속에 있는 밝은 살구빛과 우윳빛의 백합 속살을 집어 올려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면 쫄깃쫄깃한 촉감과 향긋한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절대로, 빈 껍질에 남은 국물을 놓치지 말 것! 그것이야말로 백합죽과 백합탕을 그답게 만드는 핵심중의 핵심이다. 탕이나 구이처럼 따로 특별한 양념을 하지 않은 요리들의 담백한 맛 대신 뭔가 강한 것을 찾고 싶은 이를 위해 백합찜도 준비되어 있다. 아구찜을 연상케 하는 빨간 양념에 콩나물과 각종 야채, 그리고 백합과 통오징어를 넣고 쪄낸 백합찜은 백합 고유의 향이 줄어든 대신 입에 착 붙는 소스와 야채의 조화가 매력적인 음식이며 술안주로도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