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the Splendid History

룩소르에서 조우한 역사의 얼굴

보이는 것에 반응하고, 보이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실존하지 않는 인간의 역사는 먼 얘기이다. 그래서 명맥을 이어오는 조상의 유물은 더욱 진기하고, 오늘날의 사람들도 놀랄 만큼 거대한 규모에 역사적인 가치와 높은 예술성까지 겸비한 이집트의 유적을 보기 위해 각국의 사람들이 몰려든다.

글과 사진 전준호 기자 취재협찬 대한항공, 이집트관광청

1800년대 초 서커스단의 차력사로 유럽을 전전하던 한 이탈리아 남자가 신비의 땅 이집트에 닿는다. 아내와 함께 무일푼으로 카이로를 떠돌던 남자는 우연한 기회에 테베에 있는 흉상을 옮겨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되고, 뱃길로도 두 달이나 걸리는 먼 길을 흔쾌히 나선다. 당시의 룩소르는 골드러쉬 때의 미국 서부처럼 골동품과 유물을 캐내려는 뜨내기들로 들끓었다.

‘죽은 자의 땅’에 있다는 조각상을 운반하기 위해 한 신전에 닿은 남자는 처음 보는 장대한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져 사방을 돌아본다. 마치 거인들이 살다 가두고 떠난 듯한 거대한 신전에는 1천 톤이 넘는 대형 조각이 부서져 땅에 뒹굴고 있고, 한 아름이 훨씬 넘는 둘레의 기둥에는 정교하고 세밀한 부조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각상을 무사히 카이로로 실어 보낸 그는 아내와 함께 은밀히 남쪽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고, 나일을 거슬러 누비아에 닿은 후 람세스 2세 장제전과 아부심벨 대신전 등 역사에 기록될 ‘위대한 발견’을 거듭한다. 이탈리아의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Giovanni Belzoni)의 이야기다.

 

신왕국의 중심지, 룩소르

지오반니 벨조니의 ‘위대한 발견’은 이후로도 계속되었고, 그의 발굴을 시발로 고대 이집트의 신비가 풀리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룩소르는 유물을 발견하려는 열기로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랐다. 룩소르를 제대로 알려면 신왕국시대의 이집트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테베(Thebe)는 이집트의 종교적 정치적 중심지로 아주 번화한 도시였다. 우리에게도 익히 유명한 람세스 2세나 투탕카멘 모두 이 시대의 파라오들인데, 신왕조가 번영하는 동안 이집트를 다스렸던 파라오들은 앞 다투어 신을 경배하고 그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신전과 기념관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 테베가 지금의 룩소르이다.

태양이 지는 서쪽은 죽은 자의 땅으로, 저승이 있다고 믿었던 고대 이집트인들의 영향으로 지금의 룩소르에도 유적이 나뉘어 있다. 이집트를 길게 가로지르는 나일강을 기준으로 서안에는 파라오들이 사후의 안식처로 삼았던 왕의 계곡과 왕비들의 묘가 있는 왕비의 계곡, 귀족의 무덤, 람세스 2세의 장제전인 람세움을 비롯한 왕들의 장제전이 모여 있고, 동안에는 카르나크 신전, 룩소르 신전 등 신에게 바치는 신전들이 자리 잡고 있다. 

 

파라오는 나일의 서안에 잠들었다

노란 흙먼지가 날리는 길을 달려 왕의 계곡(Valley of the Kings)임을 알리는 문 앞에 내리면 그저 휑한 모래언덕이 펼쳐진다. 대기 중에 수분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버쩍 마르기만 한 이 골짜기까지 파라오의 시신을 옮겨온 것은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왕의 미라와 함께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과 온갖 보석을 안치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왕의 묘에 침입하는 일이 잦았고, 그런 불의의 사고에 대비해 계곡의 바위 표면을 뚫고 형성된 왕의 계곡에는 산줄기를 따라 파라오들이 잠들어 있었다.

보존 상태가 좋지 않아 입구를 폐쇄한 람세스 2세의 묘를 그냥 지나쳐, 람세스 4세의 묘로 들어간다. 점점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 3개의 긴 복도를 지나면 큰 석관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묘실에 닿는다. 수천 년 동안 파라오가 잠들어 있었을 석관은 높이가 2미터는 족히 될 만큼 높다. 이 미 미라는 카이로의 박물관으로 옮겨진 뒤지만, 여전히 남은 석관은 군데군데 벗겨지기는 했으나,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몇 천 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외벽에 칠해진 색감이 살아 있다.

 

묘의 주인과 그 시신을 담은 관을 장식한 사람도 이미 사라지고 먼지조차 남지 않았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지만, 전혀 다른 땅의 내가 그 자리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사실 이집트의 어디를 가든 어쩐지 일그러진 듯한 시공간의 어색함과 맞닥뜨리게 되지만). 손상상태가 심해 보이는 람세스 3세의 묘를 거쳐, 앞서 언급한 이탈리아 탐험가 지오반니 벨조니가 발굴해낸 람세스 1세의 묘로 다시 들어간다.

왕의 계곡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이곳은 복도와 묘실 내부의 천장과 벽 모두 선명한 색과 부조가 살아 있어 그림 속 인물의 손톱 매니큐어와 발톱의 페디큐어까지 섬세한 실루엣을 볼 수 있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의 묘지에서 나오자, 저쪽 모래 언덕위에서 새로운 발굴 작업이라도 벌어지는지 일하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인다. 볕이 너무 뜨거워 그런지 어쩐지 그들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보인다.

 

핫셉수트 장제전과 멤논의 거상

고대 이집트에도 여왕의 통치 기간은 있었다. 이집트 역사를 통틀어 총 6명의 여왕이 있었는데 그중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사람은 핫셉수트(Hatshepsut) 여왕 정도다. 신 왕국이 시작된 후 왕조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처음으로 왕의 계곡에 잠든 투트모세 1세의 장녀인 여왕은 이복동생인 투트모세 2세와 결혼했다가 곧바로 왕위를 이어 받았다.

여왕을 반기지 않는 당시의 상황 때문에 남자 옷을 입고 수염까지 붙이는 등 남자로 살았던 그녀의 모습은 데이르 엘 바하리(Deir al-Bahri)의 거대한 절벽 아래에 있는 장제전의 오시리스 기둥에도 부조로 새겨져 있다. 장제전은 그녀의 뒤를 이은 투트모세 3세에 의해 일부 훼손되기는 했지만 카르나크 신전에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모습이라든지 당시 일반인들의 삶을 알 수 있는 사냥과 고기잡이, 교역을 위해 소말리아와 푼트로 떠나는 원정대의 모습, 신왕조시대에 특히 중요시 되던 아문(Amun) 신의 딸의 탄생 장면이 부조로 남아 있어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핫셉수트 장제전에서 길을 돌아 나오면 넓은 벌판에 그야말로 휑하니 서 있는 2개의 큰 좌상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세월을 짐작케 하듯 군데군데 허물어져 내렸지만 이 석상만으로도 화려했던 옛날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드는 멤논의 거상(Clossi of Memnon)이다. 석상은 원래 람세스 2세에 앞서 신왕국시대의 절정기를 이뤘던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것이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카르나크 신전 내, 아문 대신전을 확장시키고 룩소르 신전을 세우는데 최근에 룩소르 신전에서 마차를 탄 그의 부조가 발견되기도 했다. 아멘호테프 3세 좌상의 다리 사이에는 그의 왕비와 어머니의 조각까지 작게 새겨져 있으니 유심히 살펴볼 것.

 

 

신에게 바치는 경배

현지인보다 관광객과 그들을 실어 나르는 차량이 더 많이 오가는 나일강변의 한적한 도로를 걷다보면 담장 저편으로 허물어진 라임스톤 옹벽의 카르나크(Karnak) 신전이 나타난다. 람 세스 2세가 대기와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관장했던 아문(Amun) 신을 상징하는 숫양의 머리를 한 작은 스핑크스들을 만들어 둔 참배 길을 지나면 탑문 앞에 투트모세 1세가 세운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원래 이곳은 아문과 그의 아내인 무트(Mut) 여신, 아들 콘스(Khonsu)신에 바치는 신전과 부속 건물이 고작이었는데 신왕국시대의 파라오들이 차례대로 신전을 증축하고 그들의 업적과 일화를 새기며 점점 확장되어 지금은 이집트를 통틀어 가장 큰 신전으로 꼽힌다. 외부에서는 낡은 옹벽하나만 보이지만 겹겹이 문을 지날수록 방대해 지는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옹벽과 기둥마다 시기별 파라오들의 얘기가 조각되어 있는데 람세스 2세의 입상에 특히 눈이 가는 이유는 서 있는 그의 다리 사이로 네페르타리(Nefertari) 왕비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 수십 명의 후궁들로부터 100명이 넘는 자손을 얻었지만, 그녀에 대한 사랑은 각별해서 별도의 장제전까지 만들었다는데 이곳 카르나크 신전과 아부심벨의 대신전에도 람세스 2세의 조각상 옆에는 늘 그녀가 함께 한다.

신전 입구에 있는 숫양머리 스핑크스는 매년 오페트 축제(Opet Festival, 아몬의 신상을 모신 신관들이 카르나크 신전에서 룩소르 신전까지 퍼레이드를 하는 행사)가 열리면 아문의 아내와 아들을 위한 카르나크의 부속 신전인 룩소르 신전으로 옮겨졌다. 룩소르 신전의 건설에는 특히 아멘호테프 3세와 람세스 2세가 심혈을 기울였고, 그래서인지 신전 곳곳에 유독 두 파라오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 시기의 오페트 축제 장면과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와의 대규모 전쟁을 벌였던 카데시 전투에 대한 내용도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눈여겨보자.

이집트에서의 일정동안 함께 했던 가이드는 세계 각지에 흩어진 선조의 유물이 자연스레 홍보 역할을 해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했지만, 조금씩 더 낡아가는 신전에 덩그러니 선 오벨리스크는 어쩐지 허전하다. 돌을 깎고 다듬어 세운 옛 테베는 그 영광을 누리던 사람들과 더불어 조용히 사라지고 그 땅에는 점차 낡고 허물어져 가는 미약한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남루할지언정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 온 과거의 흔적들은 옛 테베와 지금의 간극을 메우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룩소르의 땅을 밟는 어느날, 또 다른 과거의 흔적을 모래 밑에서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