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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06월호] 대륙분류 : [유럽] 국가분류 : [영국] 도시분류 : [더블린]
기사제목
[ESSAY] 보헤미안의 또 다른 고향
| 그게 어디든, 떠나는 사람은 설레임과 두려움을 갖는다. 7개월 전 런던 히스로 공항에 도착 했을 때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더블린으로 떠나는 오늘은 설레임이 가슴 한쪽을 기분 좋게 두드린다. 비행기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꼭 조이니 이제야 떠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실감이 난다. 잠시 후 옆자리에 금발미녀 마저 앉았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컴비네이션. 출발이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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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블린에서 |
영국에서 더블린으로 가는 비행기는 한 시간가량 날아 아일랜드 상공에 들어 왔다(영어 안내방송을 들은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었다. 공중에서 보이는 아일랜드는 한마디로 ‘초록색’. 푸른색 바다 한가운데 둥실 떠있는 초록색 대지와 마주했을 때의 벅찬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더블린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공항에서 달러를 유로로 환전하고 더블린 시티센터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기 위해 안내데스크로 갔다. 맘 좋게 생긴 아주머니에게 물어보았는데,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겠다. 그래도 언어연수 7개월 차인 난데…. 이것이 말로만 듣던 아이리시 악센트인가 보다. 말이 상당히 빠르고 억양도 세다. 아주머니껜 대충 알겠다고 하고 직접 정류장을 찾아 나섰다. 정류장은 의외로 출구 바로 앞에 있었다.
더블린 시내까지의 요금은 1유로 70센트. 이곳 물가도 만만치 않다. 달리는 버스의 창문을 여니 비 오는 날 특유의 풀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아, 나는 정말 아일랜드에 온 것이다! 버스 안의 손님은 대부분이 나 같은 여행객들이었다. 비행기에서 내 옆에 앉았던 금발 미녀도 눈에 보인다. 반갑다. 버스로 30분 정도를 달려 더블린 시내에 도착했다. 더블린의 최고 번화가라는 오코널 스트리트였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런던보다는 소박한, 뭐랄까 정감 있어 보이는 시내 풍경이다.
사람들 또한 그리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눈이 마주치면 한번씩은 꼭 웃어 주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 나는 영국에서 구해온 가이드북의 소개를 따라 더블린 스파이어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더블린 스파이어는 120미터 높이의 첨탑으로, 이곳에는 4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넬슨 제독 동상이 서 있었다고 한다. 이 첨탑의 설립 시점이 때마침 1인당 국민소득이 영국을 앞지른 때라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것을 ‘식민지의 한(恨)을 안겨준 영국을 경제적으로 앞지른 승전탑’이라고 말한다. 왠지 그들의 식민지의 한이 우리네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 친근감이 들었다. 짐을 풀기 위해 예약해 놓은 숙소를 찾았다.
물론 숙소는 여행의 참 맛이라 생각하는 유스호스텔의 도미토리. 시내에서 가까워 찾기 좋았다. 숙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여행을 할 때 웬만하면 도미토리를 고집한다. 여행에 기분 좋게 지친 다른 여행자들과 몸짓발짓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들기 위해 낡은 이층 침대에 누우면 내가 정말 방랑자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저렴한 가격도 한 몫 한다.
짐을 대충 풀어 놓고 가벼운 차림으로 유스호스텔을 나왔다. 다음은 가이드북에 ‘꼭 가봐야 할 곳’이라고 빨간 동그라미까지 그려져 있는 템플바로 향했다. 이곳은 펍(pub) 밀집 지역으로, 젊음의 자유와 라이브 음악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템플바는 생각보다 작은 규모의 거리였다. 돌조각으로 끼워 맞춘 고풍스러운 보도블럭의 좁은 골목을 따라 수십 개의 펍들이 늘어서 있었고, 모든 펍에서는 아이리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거리의 음악가들은 취기에 사로잡힌 행인들을 위해, 예술혼에 사로잡힌 자신을 위해 저마다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묘한 흥분감이 일었다. 나는 입구가 가장 예쁘게 색칠된 펍을 골라 들어갔다.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실내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맥주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춤을 추고 있었다. 나도 갈증을 느껴 아일랜드의 명품 흑맥주인 기네스를 한 잔 주문했다. 어정쩡한 폼으로 서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한 남자가 와서 말을 건다. 그(이름은 듣는 동시에 까먹었다!)는 이탈리아에서 온 관광객이었다.
자신의 누나와 함께 여행 왔으며 여행 삼일 내내 이곳에서 술만 먹었단다. 역시 정열의 이탈리안이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그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2002년 월드컵 이야기를 한다. 이 정열의 이탈리안은 30분 내내 한국 대 이탈리아 경기 중 주심의 부정판정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2006년 월드컵에서 다시 겨루어 보잔 말로 그를 달래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와 나는 그리 오래 얘기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금방 친해졌다. 이방인 특유의 여유로움으로 낯선 이와 웃고 떠들면서 여행지의 밤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 여행의 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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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웨이로 |
전날 과음을 한 탓에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결국 이리저리 뒤척이다 11시가 돼서야 유스호스텔을 나왔다. 밖에는 또 부슬부슬 비가 왔다. 나는 꼭 가보고 싶던 기네스 브류어리로 향했다. 이곳은 아일랜드 흑맥주인 기네스를 만드는 곳이다. 전 세계에 판매되는 기네스 맥주를 이 한 공장에서 다 만든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규모다. 기네스 맥주 박물관에 올라가자 더블린 시내가 한눈에 다 들어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 한 잔 안 마실 수 없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맥주는 상당히 고소하며 약간 연기 냄새가 났다. 또, 흑맥주 특유의 짙은 갈색 거품이 아주 부드럽게 입술을 당긴다. 이제 버스를 타고 아일랜드 서쪽의 골웨이로 가야 한다. 미리 알아봐 두었던 고속버스터미널로 서둘러 갔다. 버스가 출발하고 20분쯤 지나 더블린을 벗어나니 끝도 없는 초원이 계속됐다.
이슬비가 내리는 초원에는 양과 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으며, 드문드문 집들도 보였다. 바로 이 풍경이 내가 그려왔던 아일랜드의 풍경이다! 만약 다음 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꼭 아일랜드 초원 위의 양치기가 되고 싶다. 세 시간쯤 지나자 끝이 안 보일 것 같던 초원이 끝나고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골웨이는 아일랜드 제 2의 도시로, ‘중세의 역사와 면모를 잘 보존하고 있어 아일랜드의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아일랜드답다’고 가이드북은 말했다. 또, 사진을 보고 내가 한눈에 반해버린 모허 절벽(cliffs moher)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골웨이에 도착한 나는 우선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적당한 식당을 찾아 나섰다. 한 20분쯤 헤맸을까, 내 위치가 궁금해서 지도를 펴들었다.
나는 20분만에 골웨이 시내를 구석구석 한바퀴 다 돌고 원위치에 와 있었다. 이토록 작은 시내에는 현대식 유행에 발맞춘 가게부터 골동품 가게, 카페와 바, 작은 음식점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확실히 더블린과는 다른, 뭐랄까 좀 더 보헤미안의 영혼이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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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웨이에서 |
아침 일찍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풀 아이리시 브렉퍼스트로 배를 채웠다. 베이컨, 소시지, 계란프라이와 호밀빵으로 구성된 전혀 가볍지 않은 이 아침식사가 왜 아일랜드의 유명한 음식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버스투어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집결장소로 나가 버스에 올라탔다. 푸른 들판과 바다가 맞물려 있는 꼬불꼬불한 좁은 도로를 굽이굽이 돌아 마침내 모허절벽에 도착했다. 절벽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는 조금 올라가야 하는데, 마치 제주도의 성산 일출봉 올라가는 길과 흡사하다.
숨이 가빠지기 시작할 정도로 올라가니 눈앞에 갑자기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다. 너무 순식간에 푸른 바다와 함께 거대한 절벽이 드러나자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날카로운 정을 때려 뚝뚝 깎아놓은 것 같은 2백 미터 높이의 절벽이 이렇게 8킬로미터나 이어진다. 역시 자연은 위대했다. 모허 절벽이란 인간의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위대함, 그 자체였다. 수백만 년 그 자리에서 바다를 보며 우뚝 서 있었을 절벽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내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곳이 어디든, 나의 집으로. 여행은 세상의 출구이자 입구. 떠날 때 떠날 줄 아는 것, 돌아올 때 돌아올 줄 아는 것이 진짜 여행이 아닐까 한다. 세상에 지쳐 떠난 나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내가 본 절벽은 언제고 바다와 맞선 그 자리에, 또 내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어재규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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